3월, 2018의 게시물 표시

2018년 3월 31일

1. 감히 사는 게 무섭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감히'라는 부사를 붙인 것은 내게 삶을 무서워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체력과 정신력 모두 약하다. 그렇기에 조급해서는 안 되고 내 약함에 맞는 페이스대로 살아야 한다. 내가 당장 먹고살 돈이 없어서 억지로 혹사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나는 부모 집에 얹혀 살고 있고, 내가 얹혀 산다고 해서 부모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을 겪는 것도 아니다. 집은 춥지도 덥지도 않고, 침대는 푹신하고, 맛있는 흰쌀밥은 부족하지 않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화하며, 전혀 초조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되뇌어도, 이 글을 쓰는 나는 계속 불안해서 손이 떨리는 것이다. 나의 인식이 왜곡되는 것을 이성으로써 교정해도, 몸은 불안을 호소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무고한데 부당한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2. 삶이라는 형벌로 괴로운 와중에는 (정말로 철학충이 좋아할 법한 표현을 쓰게 되어 부끄러운데, 내가 철학충이라 어쩔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말에 정말로 고마움을 느끼고 그것들에 계속 목 마르게 된다. 내 글이 좋다는 말, 에쎌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죠 같은 말... 이런 말들에 기쁨을 느끼는 게 가끔은 내가 죽지 않으려고 그 말에 엄청나게 의미 부여를 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게 아닐까 싶다. 죽고 싶지는 않다... 나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하지만 너무 무섭다. 무서움과 버거움과 피곤함이 나를 갉아 먹는데 나는 그 고통에 나 자신을 내어주면서 자연사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2018년 3월 29일

1. 미니마 모랄리아를 재밌게 읽고 있다. 아도르노가 안 죽으려고 미국으로 망명 가 있던 시절에 인터넷이 발달하고 블로그가 있었으면 블로그에다 쓸 것 같은 글들로 엮여 있는 책이다. 읽고 있으니까 왜 친구가 이제껏 아도르노를 안 읽은 게 신기하다고 타박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독서실에 가서 햇볕이 잘 드는 카페테리아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다... 한두시간 정도 그렇게 하고 있으면 어느 정도 삶이 살 만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고 있으니까 햇볕이 얼마나 인간의 건강에 중요한지 절실히 깨닫는다. 오후 네시가 넘어가면 더 이상 집중을 하기 어렵고 슬슬 집에 가고 싶어진다. 마침 그때쯤 배도 고파져서 집에 갈 명분이 충분히 생긴다. 밖에서 밥을 사먹으면 돈이 드니까 집에 남아 있는 밥과 반찬을 먹자! 만약 성실하고 건강한 학생이라면 집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에 다시 독서실에 와서 밤까지 공부를 했겠지만 나는 건강하지 못하기에 저녁밥을 먹고 침대에 눕는다. 요새는 엄마 혹은 아빠가 매번 저녁을 차려줘서 먹는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부모님이 끼니까지 차려주니까 약간 내 자신이 식충이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식충이 삶이 얼마나 편안한지, 죄책감으로 그 편안함을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대충 언제까지 죄책감 없이 식충이 삶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20대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그 이전까지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살기가 싫어서 침대에만 누워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잘 살아야 한다는 초조함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언제 저녁밥을 퍼먹고 있는 내 옆에 아빠가 앉아서 행복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산다고 대답했다. 아빠는 지금도 이 나이 먹고 솔직히 앞이 안 보이는데 네 나이 때에는 더 했다고 말했다. 아빠 말에 맞다고 대답했다. 2. 엄마가 내 옷장에서 내가 아끼는 캐시미어 목도리를 꺼내 세탁기에 돌렸다. 안방 서랍장 위에 개어 놓은 내 팬티와 양말 아래에 깔려 있는 목도리를 보자마자 나는 혈압이 올랐다. 당장 거

2018년 3월 4일

1. 세미나를 같이 하는 한 친구 A랑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데, A가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퀴플에 실렸던 나의 일대기를 처음 읽었을 때 '에쎌님이 진짜 많이 힘드셨었구나, 힘드시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제 자기가 심한 우울증을 겪고 그 글을 다시 읽으니 님의 고통을 절절히 공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첫 감상이 떠올랐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A는 깔깔 웃었다. 그것을 감동실화로 읽게 되었다니 우울증 환자가 되신 것을 축하드린다고, 나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후에 나는 A에게 우울증 선배로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주고 싶어 쓸데없는 조언 몇 마디를 건넸다. A가 나의 우울증 수기를 읽고 팬이 되었다는 것은 A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나 (왜냐하면 A가 심한 우울증 환자가 되었다는 것이니까),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걱정이 되는 것과 별개로 A가 나의 글을 읽고 공감과 위로가 되었다는 감상은 나를 기쁘게 했다. 이제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칭찬은 내 글에 대한 칭찬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트위터 멘션으로 텀블러 시절부터 나의 일기를 잘 읽고 있노라고 말해주기도 했었다. 기분이 좋았다. 2. 오후 네다섯시 경이 되면 두뇌뿐만 아니라 몸뚱아리에도 남는 힘이 거의 없어진다. 어제는 정말로 하늘도 화창하고 기온도 포근한 봄날씨였는데, 봄날씨를 맞아 사람들은 행복한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전혀 행복할 힘이 없었다. 독서실에 4시간 정도 버티고 있다가 도저히 앉아있기가 힘들어서 밖에 나왔다. 그런데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이제는 일찍 들어오는 나를 보고 엄마든 아빠든 별 말을 안 하지만, 나는 그냥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B에게 오늘 저녁에 홍대에서 놀까? 라는 카톡을 보냈다. B는 바로 답을 주었다. 언제 만날지 시간도 정했는데,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에 심한 무기력증이 도져서 B에게 그냥 오늘 보지 말고 다음에 기회될 때 보자고 말해버렸다. 5분만에 만날까? 아니다 만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