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4일

1. 세미나를 같이 하는 한 친구 A랑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데, A가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퀴플에 실렸던 나의 일대기를 처음 읽었을 때 '에쎌님이 진짜 많이 힘드셨었구나, 힘드시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제 자기가 심한 우울증을 겪고 그 글을 다시 읽으니 님의 고통을 절절히 공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첫 감상이 떠올랐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A는 깔깔 웃었다. 그것을 감동실화로 읽게 되었다니 우울증 환자가 되신 것을 축하드린다고, 나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후에 나는 A에게 우울증 선배로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주고 싶어 쓸데없는 조언 몇 마디를 건넸다.

A가 나의 우울증 수기를 읽고 팬이 되었다는 것은 A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나 (왜냐하면 A가 심한 우울증 환자가 되었다는 것이니까),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걱정이 되는 것과 별개로 A가 나의 글을 읽고 공감과 위로가 되었다는 감상은 나를 기쁘게 했다. 이제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칭찬은 내 글에 대한 칭찬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트위터 멘션으로 텀블러 시절부터 나의 일기를 잘 읽고 있노라고 말해주기도 했었다. 기분이 좋았다.

2. 오후 네다섯시 경이 되면 두뇌뿐만 아니라 몸뚱아리에도 남는 힘이 거의 없어진다. 어제는 정말로 하늘도 화창하고 기온도 포근한 봄날씨였는데, 봄날씨를 맞아 사람들은 행복한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전혀 행복할 힘이 없었다. 독서실에 4시간 정도 버티고 있다가 도저히 앉아있기가 힘들어서 밖에 나왔다. 그런데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이제는 일찍 들어오는 나를 보고 엄마든 아빠든 별 말을 안 하지만, 나는 그냥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B에게 오늘 저녁에 홍대에서 놀까? 라는 카톡을 보냈다. B는 바로 답을 주었다. 언제 만날지 시간도 정했는데,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에 심한 무기력증이 도져서 B에게 그냥 오늘 보지 말고 다음에 기회될 때 보자고 말해버렸다. 5분만에 만날까? 아니다 만나지 말자... 라고 태세전환해버린 나 자신이 너무 우스웠지만 약속을 취소하는 것은 우울증자에게 흔한 일이었기에, B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B는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고 집에 바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근처에 있는, 산책로가 딸린 상점거리로 힘겹게 걸어갔다. 음식점이 옆에 있는 청계천 같은 곳인데, 거기서 3900원짜리 쌀국수를 먹었다. 미스사이공 같은 가게였는데 이 가게의 기본쌀국수에는 고기가 없었다. 양파와 숙주나물과 면밖에 없는 국수를 먹고 집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날씨가 좋아서 정말 사람이 많았다. 어린애들과 그들의 부모들이 자전거와 킥보드 등을 타면서 따뜻한 날씨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힘들었다.

집에 도착해서 계속 누워 있었다. 어떤 의욕도 흥미도 없는 상태로, 간신히 핸드폰만 들여다 볼 수 있는 힘만 남아 있었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었다. 그냥 이런 의욕과 흥미 없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활동을 찾을 수가 없다. 스팀 라이브러리에는 18개의 게임이 있고, 파이널판타지14에는 아직 정액제가 남아 있었고, 유튜브에는 무수히 많은 게임방송이 있고, 책장에는 읽어야 할 책이 1억권은 있는데,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누워 있으면서 꼭 월요일엔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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