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18의 게시물 표시

2018년 6월 24일

지겨울 정도로 아프고 힘들다. 제발 우는 소리 좀 내지 말라고 주변 사람들이 못 참고 말할 때까지 계속 아프고 힘들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어리광이 심한 편이라 아프고 힘들다는 말을 속으로 꾹 참을 수가 없는지라, 주변 사람들이 지쳐 떨어지고 나 자신조차도 지칠 때까지 계속 아프고 힘들고 죽겠다는 소리를 되풀이하면 될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이렇게 심하게 아프고 힘든 시기가 오랜만에 찾아 왔다. 심지어 아프고 힘든 시기가 내 예상보다 꽤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있다. 괜찮아 질 때 쯤이면 다시 힘들고 아픈 게 시작되니, 솔직히 올해의 불운에 좀 놀랐다. 아무튼 불운 덕분에 심신이 더 상했다. 심장 박동이 확실히 빨라졌고, 상반신은 근육통에 시달려 일주일에 세번은 파스를 어깨와 등에 붙이지 않고서는 책상 앞에 앉아 있기가 힘든 정도였으니 알 만하다. 내 주변 사람들은 빨리 내가 이 불우하고 아픈 시기를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 같다. 누구도 이 불우함과 아픔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확실히 아파하고 힘들어하기 때문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나 또한 그들의 기다림을 길게 늘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런데 지금의 이 상황은 내 통제 밖에 있기 때문에, 초조함을 가지지 말고 나 또한 숨 죽이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세상은 이미 나한테 충분히 너무했지만, 극단적으로 나한테 너무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나아지겠지. 정신과 의사선생님은 우리 몸은 회복탄력성이 있기 때문에 나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다. 그리 믿고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

2018년 6월 11일

우울도 만만찮게 나를 괴롭히지만, 슬픔이야말로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든다. 나는 슬프다. 어떻게든 나의 고군분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나의 시도들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 나는 내 분수에 맞지 않은 꿈을 꾼 걸까? 아니면 내가 게으르고 멍청해서 꿈을 실현하는 일에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걸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슬프다. 자기인식이 부정적인 쪽으로 왜곡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으나, 부정으로 쏠리는 인식을 온 몸으로 막는 데 이미 한계를 느끼고 있다. 정말로 내가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이면 어떡하지? 내가 내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미련한 주제에 끈기가 없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이번 학기에 수강하게 된 서양근대철학특강 수업은 꼭 좋은 성적을 맞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이 수업과 이 수업을 이끈 선생님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당장 4시간 후 기말고사인데, 너무 슬프고 괴로워서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저번 목요일에 받게 된 불합격 소식 때문에 나는 기말고사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평소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도 못한 주제에, 막판 벼락치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데 내가 학자를 꿈꿔도 되는 것이었을까? 엄마는 그렇게 힘들어하고 잘 못하는데 왜 어려운 길을 택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엄마의 말에 설득당하고 있다. 그런데 포기하는 게 힘들다. 내가 정말 학자로서의 꿈을 버릴 수 있을까? 취직 준비를 열심히 할 수 있을까? 나는 울고 싶다. 나는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그래서 쉬고 싶은데, 점점 마음 놓고 쉬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간다. 이런데도 살아야 할까? 친구들한테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달라고 했을 때, 친구들은 "네가 죽으면 나는 무척 슬플거야"라고 했다. 친구들이 댄 이유는 나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그래서 열심히 살고자 했다. 지금은 자신이 없다.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것 같다. 일단 일기로 털어놓았으니, 다시 손에 안 잡히는 공부를 억지로 부여잡고자 한다. 여전히 나는 슬프다

2018년 6월 7일

대학원에 떨어졌다. 결국은 공부를 못해서다. 공부를 못한 이유는 망할 우울증 때문이다. 나의 아둔한 머리와 보잘 것 없는 학업능력을 조금이나마 낫게 만들려는 노력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우울증 때문이다. 요새 트위터에다가 늘 '아졸려죽을래'라는 말을 올리고 심지어 닉네임조차도 (졸려서시야와판단능력에영향받음) 이라고 바꿀 정도로 나는 졸리다. 졸려서 아무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심지어 게임을 하는 것이나 영상을 보는 것조차 집중할 수가 없어서 일찍 자는데도 늘 졸리다. 특히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면 진짜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로 끔찍하게 피곤하고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데 어떻게 공부를 한단 말인가? 노는 것조차 힘들어서 할 수가 없는 마당에? 결국에는 대학원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아무튼 내가 지원하는 과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이므로 저번 지원에 비해 딱히 나아진 것도 없고 노력한 흔적도 없는 나를 뽑아줄 리가 없다. 그러니까 당연한 결과다... 그리고 흔한 불행이다... 무언가를 꿈꿨는데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흔한 불행이고 죽었거나 살아 있는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숱하게 겪어온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너무 분하고 억울하다. 흔한 불행이라고 해서 불행이 아닌 건 아니다. 아무튼 나는 끽해봐야 네다섯시간만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도 상태가 아주 좋을 때나 그렇지, 보통은 두세시간이 한계다) 어떻게든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노력했다고 해서 결과가 좋은 건 아니다. 노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만큼 좋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되었고,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고, 목숨을 끊지 않고 생을 연명할 작정이면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일단 나는 대학원 입시를 또 도전할 마음이 없다. 적어도 이런 상태에선 말이다. 이렇게 졸리고 피곤한 상황에서 삼수를 해 봤자 헛수고다. 자살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로서는 최대한

2018년 6월 3일

요새는 자기 전에 자연 다큐멘터리를 본다. 저번에 모텔에 가서 잠든 애인을 옆에 두고 심심해서 티비를 켰는데, 우연히 내셔널 지오그래피의 다큐멘터리를 봤었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자연 다큐멘터리에 대한 흥미가 생겨서 넷플릭스에서 적당한 것을 찾아서 보고 있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집중해서 볼 필요가 없어서 좋다. 인간 놈들이 미지의 자연을 헤집고 들어가 카메라로 찍은 진기한 자연 풍경과 거기에 사는 생물들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그것들의 색깔과 움직임들에 의해 나는 일종의 미적 무관심성의 상태에 돌입한다. 그래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게 일종의 영적 명상처럼 느껴진다. 자연 다큐멘터리의 문법상 늘 포식자와 피식자의 쫓고 쫓기는 장면은 숱하게 등장했고, 다큐멘터리를 만든 사람들은 꼭 그러한 장면에 비장미 어린 서사를 부여하곤 했다. 포식자들, 특히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포식자들은 지치고 굶주려 있기에, 먹이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린다. 피식자들은 살기 위해 그들 또한 열심히 달린다. 운이 좋으면 포식자는 먹이를 잡을 수 있고, 역시 피식자 또한 운이 좋으면 살아 남을 수 있다. 늘 힘이 없어 드러누워 있는 나라는 인간 눈에는 포식자와 피식자 모두 엄청나게 애를 쓰며 사는 것 같아서, 선악이 없는 자연에는 사실 선악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그런데 당연히 자연에는 선악이 없다. 그냥 생물체들은 애를 쓸 뿐이다... 그래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내가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내가 어떤 짓을 하든 이 생물체들이 애를 쓰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오히려 자연보다는 인간 세계에 대한 생각만 더 많아졌다. 윤리라는 게 의미가 있을까?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인간과 세계와 윤리 등등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것이 나의 마음을 흐뜨려놓지는 않는다. 일단 내가 자기 전에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