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19의 게시물 표시

2019년 3월 30일

1. 할 거 존나 많다... 수업 세 개도 따라가야 하고 세미나 제의는 두 개나 들어왔고 틈틈이 내 공부도 해야 하고 눕기도 해야 하고 ts빻상블 메이저 만들기 위해 덕질도 열심히 해야 하고 생활비도 벌어야 한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다. 부담은 존나 되긴 하지만... 이것들은 의무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까지는 이 모두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존나 커서 나에게 불꽃체력 불꽃정신력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 뿐이다. 위에서 열거한 할 일 목록 중에서 의무에 가까운 건 수업 세 개 따라가기와 생활비 벌기이고... 이건 아직까진 문제가 없다. 월 30만원씩 지원해주는 지원금에 선발된다면 너무 행복할 거 같은데 안 되도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리고 의무는 아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건 덕질이다. 21살 때 에반게리온 덕질도 아주 열심히 한 편에 속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마음 맞는 오타쿠 친구를 사귀지는 못 했다. 좋은 친구들은 몇몇 있었지만 유사여캐 똘추저질드립에 웃어줄 친구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한다... 마음 같아선 회지도 내고 교류회도 열고 싶을 정도로 나는 처돈 상태다. 아무튼 철학자 동호회(연회비 약 600만원) 활동은 벅차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는 건 아직 싫다.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살아야지... 2. 다들 죽지 않기를 바란다. 며칠 뒤면 메루메루라는 정말 재미 있었고 이상했던 분이 죽은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분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그분이 자살했다는 사실, 자살 이후 그분을 둘러싼 온갖 일들을 목격한 바람에 그분을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죽은 사람과 힘든 시기를 겪는 친구와 새로 사귄 사람들과 내 주변의 여러 타인들이 나를 차지하고 있다.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어디를 걷고 있을 때 그들은 불시에 나를 꽉 붙잡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10년만 기다려 달라고 속으

~나의 정신 분석 훈련기~

1. “환상의 횡단은 언어로서의 타자의 욕망으로서의 타자와 관련하여 새로운 위치를 주체가 떠맡는 것을 내포한다. 그/녀를 분열된 주체로서 실존하게 했던 어떤 것에 투여를 하고 거주하려는, 그/녀를 야기했던 어떤 것이 되려는 움직임이 취해진다. 그것(타자의 욕망이 실린 타자의 담화)가 있었던 그곳에서 주체는 “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어쩌다 내게 일어났어”라든가 “그들이 내게 이런 일을 했어”라든가 “그 일은 운명처럼 닥쳐왔어”가 아니라 “나였어”, “내가 했어”, “내가 보았어”, “내가 소리쳤어.” 이 “추가적” 분리는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되려는, 원인의 자리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되려는 주체의 시간적으로 역설적인 움직임에 있다. 외래적 원인, 주체를 세계에 데리고 온 저 타자적 욕망은 어떤 의미에서 내면화되고, 책임져지고, 떠맡아지고, 주체화되고,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외상을 아이가 타자의 욕망과 조우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외상은 아이의 원인으로서 기능한다. 그/녀의 주체로서의 도래의 원인, 그리고 아이가 타자의 욕망과의 관계에서 주체로서 채택하는 자리의 원인. 타자의 욕망과의 조우는 쾌락/고통 혹은 향유의 외상적 경험을 구성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성적 과부하라고 기술하는데, 이때 주체는 저 외상적 경험에 대한 방어로서 출현하게 된다. 환상의 횡단은 주체가 외상을 주체화하는, 외상적 사건을 스스로 떠맡는, 그 향유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과정이다.” 브루스 핑크, <라캉의 주체>, 126~127쪽. 2. “우리는 특정한 운명의,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처음에 아무리 무작위적이거나 우연적으로 보여도 우리가 주체화해야만 하는 운명의 주체이다. 프로이트의 견해로, 우리는 그것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원초적 억압은, 어떤 의미에서, 분열을 창조하고 구조를 작동시키는, 우리의 우주의 시작에서의 주사위던지기이다. 저 무작위적인 던지기(부모의 욕망의 저 특정한 배치를)를 붙잡아야 하고, 여하간 그것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2019년 3월 13일

저번 일기에서 "아직 보지도 못한 룸메이트에게 적대감을 느꼈다"라고 적은 게 죄스러울 정도로 룸메이트는 좋은 분이었다. 그래서 기숙사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다. 아무튼 대학원 생활은 2주차고,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견딜 만한가? 오늘 저녁 수업이 끝나고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쌍화차를 사 가지고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책은 어떻게 잘 읽히고 사람들 말도 잘 들리고 그러는데, 이게 맞는 건가? 아니야 후회하지 말자 같은 아수라 대사를 곱씹었다. 목이 칼칼하고 감기 기운이 있고 피곤해서 생각이 부정적인 쪽으로 흐르는 걸까? 며칠 전에 연구실에서 수업 리딩자료를 읽으면서, 그래도 이게 나에게 덜 나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 취직해서 일을 하고 있었어도 불안함을 느꼈을 거고 이게 맞는 건가? 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공부를 하는 건 힘들지만 재미가 있다. 재미가 있나? 진짜인가? 대학원 생활은 준-직장 생활 같아서, 말하자면 직장 동료인 대학원 동기들과 같이 공부를 하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이야기를 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마음이 맞는 대학원 동기들을 적어도 셋은 사귀었다. 나 홀로였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에게는 늘 감사한 마음 뿐이다. 나는 내가 하는 행동들과 내가 내뱉는 말들이 '적절한지' 확신할 수가 없다.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병이 생겼겠지. 너무 과한 회의주의는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망친다. 정상이 뭐지? 일상이 뭐지? 어쨌든 바쁘다. 마음가짐의 문제일수도 있다. 미리 잘 준비해놔야 하고 모든 것을 완벽히 해야한다는 강박이 작동해서 바쁜 거일수도 있다. 아닌가? 하지만 대학원 수업 3개를 듣는 건 바쁜 일이긴 하다.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서, 컵라면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일기를 쓰기 전 항불안제를 먹었다. 곧 자야하니까 비염약도 먹어야 하고 취침약도 먹어야 하고 감기약도 먹어야 한다.

2019년 3월 1일

기숙사 이사를 끝냈다. 이번에는 동인지도 바리바리 싸갖고 가져갔기 때문에 이삿짐 무게가 상당했다. 그래서 신발이라든지, 옷이라든지, 폼클렌징 등의 생활용품들은 최대한 적게 가져갔다. 그냥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아침에 학교 근처에서 생필품 쇼핑이나 할 생각이다. 기숙사 방에 들어가자 이미 살고 있는 누군가의 집에 무단침입한 기분이었다. 사람은 없었고, 룸메이트가 될 사람은 방 고정을 한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이미 자기의 방식대로 자신의 것들을 배열한 곳에, 내게 남겨진 빈 공간을 내 것으로 채우면서 ‘역시 사람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본가에 있을 땐 가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방문을 닫으면 그곳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었다. 기숙사에 살면, 혈연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덜하겠지만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울적함을 한켠에 두고 살아가야 할 터였다. 침대와 서랍 밑에 쌓인 먼지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왠지 부산스러운 욕실과 화장실을 간단히 청소하고 나오면서 나는 얼굴도 본 적 없는 룸메이트에게 이미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순전히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울분이 애꿎은 룸메이트에게 튄 것이다. 적대감, 원한 감정, 그런 것들이 애먼 사람에게 향할 때마다 나는 섬짓 놀라곤 한다. 물론 속마음으로 우리는 뭐든지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그런 속마음에 가둬 놨던 적대적인 것들이 바깥으로 튀어 나올까봐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사람이 청소를 안 하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나의 숙면을 방해하는 그런 사람이면 어떡하지? 내가 이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런 강박적인 불안함을 애써 외면한 채 빠르게 짐을 풀고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 동안만 내 방일 곳, 평일에는 엄마의 방이 될 곳, 그곳은 ‘깔끔했다’. 휑했다는 표현도 적확할 것이다. 나랑 아빠가 서울에 간 사이 엄마가 데스크탑 책상을 내 놓고 방을 다시 정리한 모양이다. 왠지 모르게 계속 이 곳에서, 방문을 닫고, 오래도록 누워 있거나 책을 읽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