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신 분석 훈련기~
1. “환상의 횡단은 언어로서의 타자의 욕망으로서의 타자와 관련하여 새로운 위치를 주체가 떠맡는 것을 내포한다. 그/녀를 분열된 주체로서 실존하게 했던 어떤 것에 투여를 하고 거주하려는, 그/녀를 야기했던 어떤 것이 되려는 움직임이 취해진다. 그것(타자의 욕망이 실린 타자의 담화)가 있었던 그곳에서 주체는 “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어쩌다 내게 일어났어”라든가 “그들이 내게 이런 일을 했어”라든가 “그 일은 운명처럼 닥쳐왔어”가 아니라 “나였어”, “내가 했어”, “내가 보았어”, “내가 소리쳤어.”
이 “추가적” 분리는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되려는, 원인의 자리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되려는 주체의 시간적으로 역설적인 움직임에 있다. 외래적 원인, 주체를 세계에 데리고 온 저 타자적 욕망은 어떤 의미에서 내면화되고, 책임져지고, 떠맡아지고, 주체화되고,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외상을 아이가 타자의 욕망과 조우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외상은 아이의 원인으로서 기능한다. 그/녀의 주체로서의 도래의 원인, 그리고 아이가 타자의 욕망과의 관계에서 주체로서 채택하는 자리의 원인. 타자의 욕망과의 조우는 쾌락/고통 혹은 향유의 외상적 경험을 구성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성적 과부하라고 기술하는데, 이때 주체는 저 외상적 경험에 대한 방어로서 출현하게 된다.
환상의 횡단은 주체가 외상을 주체화하는, 외상적 사건을 스스로 떠맡는, 그 향유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과정이다.” 브루스 핑크, <라캉의 주체>, 126~127쪽.
2. “우리는 특정한 운명의,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처음에 아무리 무작위적이거나 우연적으로 보여도 우리가 주체화해야만 하는 운명의 주체이다. 프로이트의 견해로, 우리는 그것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원초적 억압은, 어떤 의미에서, 분열을 창조하고 구조를 작동시키는, 우리의 우주의 시작에서의 주사위던지기이다. 저 무작위적인 던지기(부모의 욕망의 저 특정한 배치를)를 붙잡아야 하고, 여하간 그것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Wo Es war, soll Ich werden.” 나는 외래적 힘들(언어로서의 타자와 욕망으로서의 타자)이 한때 지배했던 곳에 있게 되어야 한다. 나는 저 타자성을 주체화해야 한다.”
위의 책, 135~136쪽.
3.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선생님이 내뱉은 말에 내가 영향을 받았다. 자기 자신을 잃으면 안 돼요, 좋아하는 것을 버리면 안 돼요. 아무튼 내가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면담이 진행되었고, 거기에 내가 있었다. 선생님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저 선생님을 아주 좋아하고 있으며 저 선생님의 말에 권위를 부여한 게 나라는 것을 느끼면서, 간단히 말해 저 선생님께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선생님은 아주 친절하게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들을 많이 해 주셨다. 조금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하여 기숙사로 걸어 갔다.
<라캉의 주체>를 읽었다. 이것은 수업 교과서이기도 하다. 이것을 읽으면서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정신분석을 했으며,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들었던 말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구성하고 있는 환상이 뒤흔들렸다. 내가 내 환상을 뒤흔들었다.
아무튼 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을 사후적으로 의미화했고, 그것을 의미화하면서 내 방식대로 현실을 인식했고 환상을 구성했다. 내가 그랬다. 그런 것들이 ‘내게’ 일어난 게 아니라, ‘내가’ 그 일들을 ‘그런 일들로’ 구성했다. 그리고 그 구성에는 일정한 문법이 있었고 그것이 나를 어떤 식으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내가 구성한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걸 깨닫고 다른 방식으로 환상을 구성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타자성을 주체화해보기로 한 건데, 무언가 걸음걸이를 교정하는 기분, 안경을 새로 쓴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어지럽고 낯설었는데, 현실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현실을 다르게 편집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철학자가 되기로 선택했어. 나는 아도르노와 버틀러를 좋아해. 나는 그것을 공부하고 싶어해. 나는 이것을 끝까지 밀고 싶어, 내가 그러고 싶어. 예전에는 ‘그래야만 한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의무는 내가 나한테 부여한 거야. “나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해”가 아니라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야.
이런 식으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무조건 ‘주체화’해보면서 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강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내 현실을 편집하여 내 환상을 구성하는 이가 ‘나’였기 때문에, ‘내’가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다른 방식을 택하니까 굉장히 어지러우면서 울렁거리고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가장 강력한 권위를 끼친다는 것, 끼쳐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전에는 그런 권위자는 내가 아니라 부모, 세상, 아무튼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환상을 재편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줬던 권위를 뺏어서 나한테 넘겨 버렸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예전의 환상에서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는데, 이 환상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허이모와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하고 나니, 최근의 면담과 라캉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허이모랑 얘기하면서 이해하고 느낀 것들을 일기에 쓰고 싶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냥 다른 일기들처럼 제목을 2019년 3월 18일로 지으려고 하다가, 쓰고 나니 정신 분석 훈련기라는 제목이 더 적절하고 웃긴 것 같아서 이 제목으로 수정했다.
이 “추가적” 분리는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되려는, 원인의 자리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되려는 주체의 시간적으로 역설적인 움직임에 있다. 외래적 원인, 주체를 세계에 데리고 온 저 타자적 욕망은 어떤 의미에서 내면화되고, 책임져지고, 떠맡아지고, 주체화되고,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외상을 아이가 타자의 욕망과 조우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외상은 아이의 원인으로서 기능한다. 그/녀의 주체로서의 도래의 원인, 그리고 아이가 타자의 욕망과의 관계에서 주체로서 채택하는 자리의 원인. 타자의 욕망과의 조우는 쾌락/고통 혹은 향유의 외상적 경험을 구성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성적 과부하라고 기술하는데, 이때 주체는 저 외상적 경험에 대한 방어로서 출현하게 된다.
환상의 횡단은 주체가 외상을 주체화하는, 외상적 사건을 스스로 떠맡는, 그 향유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과정이다.” 브루스 핑크, <라캉의 주체>, 126~127쪽.
2. “우리는 특정한 운명의,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처음에 아무리 무작위적이거나 우연적으로 보여도 우리가 주체화해야만 하는 운명의 주체이다. 프로이트의 견해로, 우리는 그것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원초적 억압은, 어떤 의미에서, 분열을 창조하고 구조를 작동시키는, 우리의 우주의 시작에서의 주사위던지기이다. 저 무작위적인 던지기(부모의 욕망의 저 특정한 배치를)를 붙잡아야 하고, 여하간 그것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Wo Es war, soll Ich werden.” 나는 외래적 힘들(언어로서의 타자와 욕망으로서의 타자)이 한때 지배했던 곳에 있게 되어야 한다. 나는 저 타자성을 주체화해야 한다.”
위의 책, 135~136쪽.
3.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선생님이 내뱉은 말에 내가 영향을 받았다. 자기 자신을 잃으면 안 돼요, 좋아하는 것을 버리면 안 돼요. 아무튼 내가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면담이 진행되었고, 거기에 내가 있었다. 선생님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저 선생님을 아주 좋아하고 있으며 저 선생님의 말에 권위를 부여한 게 나라는 것을 느끼면서, 간단히 말해 저 선생님께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선생님은 아주 친절하게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들을 많이 해 주셨다. 조금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하여 기숙사로 걸어 갔다.
<라캉의 주체>를 읽었다. 이것은 수업 교과서이기도 하다. 이것을 읽으면서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정신분석을 했으며,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들었던 말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구성하고 있는 환상이 뒤흔들렸다. 내가 내 환상을 뒤흔들었다.
아무튼 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을 사후적으로 의미화했고, 그것을 의미화하면서 내 방식대로 현실을 인식했고 환상을 구성했다. 내가 그랬다. 그런 것들이 ‘내게’ 일어난 게 아니라, ‘내가’ 그 일들을 ‘그런 일들로’ 구성했다. 그리고 그 구성에는 일정한 문법이 있었고 그것이 나를 어떤 식으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내가 구성한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걸 깨닫고 다른 방식으로 환상을 구성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타자성을 주체화해보기로 한 건데, 무언가 걸음걸이를 교정하는 기분, 안경을 새로 쓴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어지럽고 낯설었는데, 현실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현실을 다르게 편집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철학자가 되기로 선택했어. 나는 아도르노와 버틀러를 좋아해. 나는 그것을 공부하고 싶어해. 나는 이것을 끝까지 밀고 싶어, 내가 그러고 싶어. 예전에는 ‘그래야만 한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의무는 내가 나한테 부여한 거야. “나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해”가 아니라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야.
이런 식으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무조건 ‘주체화’해보면서 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강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내 현실을 편집하여 내 환상을 구성하는 이가 ‘나’였기 때문에, ‘내’가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다른 방식을 택하니까 굉장히 어지러우면서 울렁거리고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가장 강력한 권위를 끼친다는 것, 끼쳐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전에는 그런 권위자는 내가 아니라 부모, 세상, 아무튼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환상을 재편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줬던 권위를 뺏어서 나한테 넘겨 버렸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예전의 환상에서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는데, 이 환상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허이모와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하고 나니, 최근의 면담과 라캉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허이모랑 얘기하면서 이해하고 느낀 것들을 일기에 쓰고 싶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냥 다른 일기들처럼 제목을 2019년 3월 18일로 지으려고 하다가, 쓰고 나니 정신 분석 훈련기라는 제목이 더 적절하고 웃긴 것 같아서 이 제목으로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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