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6일



1. 개강하고 나서는 거의 매일 새벽 네 시 이후에 (어쩔 수 없이) 잠든다. 왜냐하면 누워서 비엘 소설을 읽거나 아님 정말 단순하게도 자기가 싫어서이다. 언제는 아침 여덟 시에 잠들어서 낮 세 시에 겨우 깬 적이 있었는데, 자꾸 아침의 새 소리를 들으며 깨질 것 같은 대가리의 고통을 참으며 어쩔 수 없이 자는 게 몸에는 그리 좋지 않아서 이번 주 월요일에 정신과에 가서 이러한 나의 망한 수면 패턴을 토로해 버렸다. 그 덕에 의사 선생님께 낮잠 금지령도 당하고 무조건 아침 10시 이전에 일어나라는 (거부할 수 없는 법의 남성적 언어 같은) 조언을 들었다. 일단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것은 항우울제를 아침에 먹는 것인데 (나는 몰랐는데 지금 먹는 약이 밤에 먹으면 밤잠에 그리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서 아침에 먹는 게 좋을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만은 지키고 있다.

어쨌든 오늘도 새벽 다섯 시에 잠들어서 낮 한 시 즈음에 깼다. 그 후로 오래된 노트북처럼 버벅거리고 무거운 상태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수업을 들으러 왔는데 대체 마음 놓고 쉴 날이 11월 이후에나 찾아올 거라서 '이게 사는 건가'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은 수업 시간이고,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내일 수업 때 제출해야 할 요약문 작성을 시작했는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환멸이 나 버려서 아마 저녁 먹고 나서 더 이상 미루면 좆될 때까지 진도를 못 뺄 예정이다. 그리고 선택한 게 오랜만에 블로그에 일기 쓰기라서 좀 웃기다다.

2. 어제 저녁에 한영이랑 밥을 먹었는데 옛날에도 한영이에게 사과를 했었지만 어제 저녁에도 또 한 번 사과를 했다. (재차 한 사과이니만큼 예전의 것보다는 더 '진정성'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요새 두 명의 친구와 소원해져서, 예전에 내가 한영이를 멀리했던 것이 생각나서 한영이가 느꼈을 소원함과 외로움에 동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과를 듣고는 한영이는 그때 자신이 느꼈던 외로움과 섭섭함이 지금의 누나의 것보다는 덜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내 주변 사람 중에서 누나가 제일 여리다고 우스개소리를 했다. 아마 내가 요새 졸업논문을 쓰거나 과제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게 아니면, 그러니까 생각에 잠길 틈만 생기면 소원해진 친구들 두 명에 대한 것이 떠올리며 자연히 울적해진다고 말했기 때문에 한영이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소원해진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억울한 것도 많은데 그것을 그들을 붙잡으며 말하는 게 의미가 있나, 아니 그러니까 지금의 지친 나한테는 너무 힘든 일이고 또 내가 그들에게 집착하는 것을 보이는 일이라서 이 울적함과 억울함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누군가가 보기에 나는 그냥 '삐친' 것일테다. 하지만 나의 유년 시절부터 돌이켜 봤을 때, 토라진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나를 섭섭하게 만든 사람이 절대로 적극적으로 풀어주는 법은 없다. 그냥 사람들이 그렇다. 속에 담아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토로하는 것은 타인을 흔들고 자기 자신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 나는 더 솔직하게 말하려고 애를 써왔던 거 같다. 나에게 있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자기변호이다. 왜냐하면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화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화난 것을 모른 척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새는 나의 솔직하게 말하기가 과연 효과적으로 나를 보호했는지, 오히려 솔직하게 말한답시고 나대면서 감히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숨긴 게 아닌지 의문이 든다. 그냥 요새 일어난 소원함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진 것일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소심하고 옹졸한 것들을 한영이에게 말하면서 서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겠구나 라는 억울한 마음에 시달리는데 반대로 내게 있어 그들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게 중요한 누군가를 '잃는 게' 싫어서 내가 굳이 그런 사실을 외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내가 먼저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온전히 그것이 나만의 잘못이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그들이 내가 그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도록 자초한 거 아닌가? 그냥 쓰다 보니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길을 잃어버렸다...

아무튼 누군가와 소원해진다 치더라도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결국 나와 함께 있는 이는 '나'라는 사실을, 그것이 뼈에 사무치게 막막함을 주더라도 어쩔 수 없는 진실이라는 사실에 또 막막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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