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8일

1. 설에는 외할머니 댁에 갔다. 오빠는 취준생이라 사람 만나는 일을 극도로 꺼려서 안 갔고, 나는 갈까 말까 하다가 갔다. 생각해 보니 외할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연세도 많으시고, 설이나 추석 같은 날이 아니면 부러 외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몇 달 만에 외할머니를 봤는데, 외할머니가 나를 보고 얼굴이 좀 달라진 것 같다고 해서 코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엄마는 늘 내 코를 보면서 안 한 것 같다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외할머니의 반응에 얘 코 한 거 같애? 라고 물어봤고 나는 그럼 외할머니가 나를 키웠는데 얼굴 달라진 걸 몰라보면 수술 잘못 한 거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나한테 키가 더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늘 나를 오랜만에 만나는 어르신들은 내 키가 커진다고 말한다.

외할머니가 요새 뭐하냐고 물어봐서, 집에서 과외 하고 공부한다고 말했다. 대학원은 안 갔고? 라고 해서 이제 시험 봐야지 라고 답했다. 외할머니가 그럼 대학원 가면 4년을 더 공부하냐고 물었는데, 옆에서 엄마가 얘한테 기대 같은 거 하지 말고 얘는 공부 평생 할 거라서 그런 거 물어보면 안 된다고 답했다. 나는 엄마가 괜히 호들갑을 떠는 게 불쾌했다. 외할머니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엄마가 나를 불안정하고 불우한 인간으로 취급한 것 같이 느껴져서였다. 할머니는 부담 주려는 거 아니었다고, 늘 나랑 친오빠가 잘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왠지 나는 할머니에게 기대감을 주고 싶어서, 꼭 교수가 될 거라고 허황된 말을 뱉었다. 엄마가 옆에서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교수 될 거냐고 농담 삼아 물어서, 그럴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내가 알아서 과외로 돈 벌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라는 말에 할머니가 태희한테는 걱정이 없다는 식의, 조부모들이 손주들에게 갖는 천진난만한 믿음에 기분이 좋아서 마냥 할머니에게 (허황된)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폴더폰을 쓰는데, 내 기억으로만 해도 할머니의 핸드폰은 4년 넘은 오래된 것이다. 할머니의 폴더폰을 열면 메인화면이 내 사진인데, 몇 년 전에 엄마랑 태국 여행 갔을 때 찍은 무뚝뚝한 내 사진이다. 할머니가 나한테 더 예쁜 사진으로 메인화면을 등록하고 싶다고 해서, 할머니의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으려고 했는데 카메라 화면 전환이 안 됐다. 렌즈가 후면에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어서 문자를 통해 사진을 전송했다. 할머니한테 가끔 셀카를 찍어서 문자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나는 셀카를 별로 안 찍는다)

곧 있으니 이모부와 이모, 사촌오빠가 왔다. 이모부한테 세뱃돈을 받았는데, 이모부의 착각으로 빈 봉투를 받게 되어 내가 봉투가 비었는데요 라고 해서 거기 있는 모두가 웃었다. 그런 헤프닝을 겪고 난 뒤에 과일을 먹으면서 지지부진하고 지루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빠가 네 나이 때부터는 네가 우리한테 세뱃돈을 줘야 한다고 해서, 내가 그럼 서른살부터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지금 스물여섯이니 4년 뒤에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엄마가 네가 호언장담하니까 왠지 희망이 생기고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아까 할머니한테 거짓말 같은 기대감을 줘서 기분이 좋았듯, 엄마한테도 그런 기대감을 주는 데 성공해서 약간은 들떴다.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 옆에서 농담처럼 긍정충을 연기하곤 했는데, 그런 기만을 연기하는 일에 나 자신이 더 도취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2. 설 연휴는 내내 누워서 보낸 것 같다. 아무래도 환절기이다보니, 호르몬 변화 때문에 몸에 기운이 없다. 오늘 같은 경우 11시에 과외가 있어서 두 시간 수업하고 서브웨이가서 점심 먹고 독서실에 갔는데, 독서실 가는 길에 당장 집에 가서 누워버리고 싶다는 욕망과 치열하게 싸웠다. 독서실에 앉은 지 한 시간 만에 나는 항복해서, 세 시간도 채 있지 못한 채 집으로 와서 누웠고 엄마 생일 기념 저녁 외식을 하고 지금까지도 누워 있었다. 앉아 있으면 힘들고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누워 있으면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을 트위터에 쓰니까 친구한테서 일기를 쓰라는 답을 받았다. 그래서 노예 근성을 발휘하여 별로 생각이 없었던 일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무언가 문장이 매끄럽게 쓰여지지 않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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