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4일
1. 1월 12일 토요일
디페에 갔다. 마지막 행사답게 사람이 엄청 많아서, AT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좀 후회했다. 그런데 이미 입장권을 사뒀기 때문에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끝없이 대기줄을 거슬러 올라가며 이렇게 줄이 긴 행사는 처음이라는 감상을 트위터에 쓸 수밖에 없었다. 날씨가 춥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대신 미세먼지가 심했지만)
그런데 생각보다 줄이 빨리 빠져서 놀랐다. 대충 한 시간 정도를 예상했는데, 그 예상대로 한 시간 안에는 들어갔다. 행사장 내부는 쾌적했다. 이제껏 온리전이랑 서코만 갔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사람이 엄청 많은데 도떼기시장이 아니었다. 새삼 서코가 행사 관리를 참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디페는 스태프를 많이 고용해서 행사장 내 교통정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듯 싶었다. 이런 갓행사가 이번으로 끝이라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디페 참관객이 된 감상은 그러했다.
행사장이 쾌적한 것과 별개로 밖에서 한 시간이나 서 있었고 AT센터 1전시장과 3전시장을 둘러보는 일은 꽤나 지치는 일이어서, 세 바퀴 정도 빠르게 도는 정도로 만족했다. 꼼꼼히 볼 수록 물욕만 많아질 테니까, 그냥 힢마랑 앙스타 부스 몰려있는 곳만 꼼꼼하게 보고 행사장을 나왔다. 그러다가 트친인 소벨님이 행사장 근처 카페에 계신다길래, 인사 드릴 겸 거기로 갔다. 소벨님과 소벨님 친구이신 슬기님과 두어시간 정도 이야기했다. 키랄게임 같은 것을 열성적으로 얘기할 사람을 만나서 두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두시간 정도 이야기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그분들에게 폐를 끼칠 만한 말을 했을까 곱씹었다. 초면인 사람과 실컷 이야기하고 나서 나는 이런 식으로 항상 지난 대화를 복기하며 쓸데 없는 자기검열을 한다. 아무튼 그 나쁜 버릇을 아직 완전히 없애질 못해서, 내가 너무 많이 떠드는 바람에 잘난 척을 해 버린 게 아닐까, 무언가 실례되는 이야기를 해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행사를 뛰느라 다리도 허리도 발바닥도 너무 아파서 곧 그만 두었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기절하듯 잤는데, 다행히 내려야 할 역을 놓치지 않았다.
집에 오니 엄마가 저녁을 차리는 중이었다. 오빠는 게임을 하느라 바로 저녁을 먹지 못했고, 엄마랑 나랑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엄마는 "한 놈은 술에 미쳤고 다른 놈은 게임에 미쳤네"라는 식으로 투덜거렸다. 좀더 기운이 있었다면 엄마를 달래는 말을 했겠지만, 나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그냥 그걸 흘려 들었다. 엄마는 결혼을 후회한다는 이야기를 몇 번 하더니 곧 그만 두었다. 나는 요새 밥을 빨리 먹는다. 특히 엄마나 아빠랑 같은 식탁에 앉아있을 때 그러하다. 그들과 한 자리에 있는 것, 심지어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에도 그들이 집에 있으면 두렵고 피곤하고 고통스럽다.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온 몸이 아팠다. 동인지를 잔뜩 사서 무거운 가방을 지고 오느라 어깨도 아팠고, 앉아 있지 못해 계속 서 있고 걸어 다니느라 다리와 허리는 아팠다. 그렇게 쉬고 있으니까 그제서야 게임이 끝났는지 오빠가 부엌으로 나왔다. 부엌으로 나와서 오빠랑 엄마가 하는 이야기들이 방문을 통해 들려왔다. 엄마는 네가 게임을 하듯 나도 마찬가지로 취미 같은 걸 마음대로 할 거고 이제 너네 밥 차려주는 거 신경 안 쓸테니 알아서 잘 챙겨먹으라는 말을 했다. 굉장히 수동공격적인 말로 들려서 오빠는 미안하고 내일 내가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말했는데, 엄마는 너를 비난하려고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연신 강조했다. 아마 그럴 것이다. 문제는 듣는 사람에게는 몹시 수동공격적으로 들린다는 것 뿐. 아무튼 내일 자기는 어디 약속이 있어서 맛있는 거 사줄 필요 없다고 말했고, 오빠는 눈치껏 설거지를 다 하더니 그럼 나중에 시간 날 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런 식으로 대화는 끝났고, 엄마가 틀어 놓은 TV 소리만 들려왔다.
그런 것을 듣다가, 오늘 사온 동인지 읽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체력 회복이 빨라서 책상 앞에 앉아 동인지들을 읽었다. 오랜만에 동인지를 읽으니 기쁨쾌락눈물감동아헤가오더블피스적인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마추어인 오타쿠들이 자기의 욕망과 정념과 열정을 담아낸 그림과 글이 너무 좋다. 수많은 동인녀남들이 했을 망상인 '내가 갑부라면 이들의 생계 전반을 책임지고 맨날 그림을 그리고 글만 쓰게 만들어 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며, 사온 동인지들을 모두 읽었다. 동인지를 읽고 취짐전 약을 먹고 일찍 누웠다.
2. 1월 13일 일요일
11시 과외 수업이 있어서 아홉시 반에 일어났다. 과외학생네 집은 도보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대충 10시 20분 즈음 출발하면 아주 넉넉하게 과외학생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다. 가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허기가 거슬려서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따뜻한 두유를 한 병 마셨다. 그리고 2시간 정도 열심히 수학을 가르쳤다. 수학을 가르칠 때야 말로 내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다. 역시 사람의 자존감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돈을 버는 일을 하는 것이다. 가치 있는 기분이 드는 거와 별개로 2시간 정도 '수학을 가르치는 안드로이드' 노릇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무지막지하게 피곤해져서,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바로 침대에 쓰러져 기절하듯 낮잠을 잤다. 세 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전날 디페에 가서 삭신이 쑤신 것도 기절 낮잠에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일어나서 어제 사온 동인지들을 다시 한 번 읽고 다시 감탄하고 취침약을 먹고 일찍 누웠다.
3. 1월 14일 월요일
대충 7시 즈음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갔다오고 다시 누워서 잠을 잤다. 중간에 몇 번 정신이 들다가 다시 잠들다가를 여러번 반복했다. 엄마가 예전에 자기는 월요일을 청소의 날로 지정해두고, 네가 청소를 도와주면 좋을 것 같다 라고 이야기한 게 떠올라서 아침 열 시 정도에 억지로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엄마한테 "오늘 청소해?"라고 물어봤다. 엄마는 그냥 귀찮으니까 하지 말자고 했다. 나는 아침을 빠르게 해치우고 아침약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전기장판으로 따뜻해진 이부자리는, 각성제를 먹어도 의식을 몽롱하게 만든다. 계속 잤다. 그런데 선잠을 자서 꿈을 여러 번 꿨다. 그리 좋지 않은 꿈이었던 것 같다.
두 시 즈음에 엄마가 자기는 나가본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이러다가 하루 종일 꼼짝 없이 누워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물론 하루 종일 자도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너무 많이 누워 있으면 저녁 때 머리가 지끈거리고 허리도 아플 것이다. 일어나서 씻고 카페에 와서 지금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씻으면서 불안했다. 내가 불안해하는 건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철학자라는 것이 되려고 똥꼬쇼를 펼치는 과정에서 생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모부의 갈등 속에서 눈치를 보는 작금의 상황이다. 사실 전자보단 후자가 더 압도적으로 불안하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얽혀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모부의 갈등 중 하나가 "딸자식이 학위를 따는데 부모된 자의 가오로서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학부까지 등록금을 내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석사부터는 학자금 대출을 받을 것이고 최대한 장학금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며 지금 이대로 과외를 한다든가 수업 조교 등을 통해 생활비를 마련할 것이니 그냥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기숙사 월세나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부모는 아무튼 죄책감 비스무리한 것을 느끼는 것을 멈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특히 아빠가 그렇다. 언제 아빠는 술에 취해서 자기는 그래도 보수적인 데가 있어서, 딸자식의 꿈을 끝까지 지원할 수 없는 게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돈을 못 버는 걸...
아무튼 이런 상황이어서 그들은 내가 꿈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과 동시에, 내가 자발적으로 꿈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확실히 예민한 탓인지 그런 것들이 다 읽힌다. 그냥 사람이 모여 있는 어떤 곳에 가면, 그 곳의 공기를 읽고 내가 어떻게 굴어야 '무던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가를 비자발적으로 수행하는 그런 쫄보가 나라서 그렇다.
혼자 있고 싶다.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 끔찍하다. 내가 대면하고 있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이 사람한테 미움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굴어야 하는지를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는 내가 싫다.
전에 마누라를 만나 이런 상황을 이야기했고, 마누라는 최대한 집에 없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조언을 해 주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집 밖에서는 내가 누워 있을 곳이 없다. 나는 누워 있고 싶다. 따뜻하고 안락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잠들고 싶다. 잠을 많이 자다 보면 몸도 정신도 튼튼해지겠지. 그걸 위해 열심히 스트레칭도 하고 영양제도 꼬박꼬박 먹는다. 그리고 잠을 자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요새 바라는 건 내 자의식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평소의 나처럼 보이는 것이다. 기계가 되고 싶다. 자의식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히려 자아를 단단하게 만드는 게 나을까? 하지만 나는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버릴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부의 경우, 그들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나는 안다. 그런데 안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억울할 것이다. 물론 그 억울함을 애먼 사람에게 푸는 건 잘못된 일인데,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니까, 가장 가까운 이에게 그런 식으로 불똥이 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모부를 미워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자아가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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