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1일
1. 세미나를 끝내고 친구들이랑 수다 떨고 집으로 오면서 뚜부랑 뿌수미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2017년에 기억할 만한 일? 잘한 일? 중 하나가 이들과 친해졌다는 것인데, 이들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다는 외적 조건이 컸기 때문에 '이들과 친해진 게 잘한 일이다'라는 말은 조금 어색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러한 외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이들과 친해진 결과가 나한테는 즐겁고 좋은 일이기 때문에 '좋은 게 좋은 거지 뭐'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나 자신이 만족스러울 만큼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많아지고 나의 육신이 늙어가는 것이기에 나쁜 일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기도 해서 좋은 측면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올해에는 뚜부와 뿌수미랑 더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재미 있고 좋은 사람을 새로 사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자신이 나에게 덜 부끄러운 사람일 수 있기를, 앞으로 살게될 삶을 버틸 수 있기를, 많은 것을 깨닫고 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2. 2017년 하반기에는 내가 많이 자기중심적이었고 그런 성향이 내 졸업논문에도 많이 반영되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한 자기중심적 태도는 심지어 내가 생각하는 윤리의 기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정말 애새끼같게도 나는 나 같은 사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나 같지 않은 사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던 것이다. 옛날에 열여섯살 즈음에 과외 선생님이 나한테 지적했던 사실을 잊고 있다가 혹은 외면하고 있다가 요즈음 나의 상황과 나의 친구들 덕분에 의식적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윤리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은 무척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무척 서사화를 좋아해서 나의 모든 것을 서사화하고자 하는 경향, 소위 말해 '드라마퀸'적 면모가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또한 '구원자 되기' '예수 되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서사화를 좋아할 수는 있으나, 위에서 언급했던 나의 자기중심적 태도랑 맞물려서 서사화를 지나치게 확장하여 일반화하는 위험은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는 모순적인 게 있고 서사화되지 않는 측면이 당연히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억지로 서사화로써 합리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은 일? 무리한 일? 이 될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이러한 면모를 아예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나, 상황과 나의 친구들 덕분에 더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 어떤 통찰을 얻고 어떤 변화를 맞을 수 있게 되는 것에는 상황과 환경이라는, 어찌 보면 굉장히 우연적인 계기가 큰 작용을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3. 한 친구에 대한 불쾌함을 의식하고 있다. 오늘 그 친구를 만나게 되어 요즈음 의식하고 있는 그러한 불쾌함에 대해 토로했는데, 그 불쾌함을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지적으로 인해 나의 구원자 되기에 대한 열망과 자기중심적 태도가 이 친구를 어떻게 내 입맛에 맞게 바꾸고 싶다는 태도를 의식했다.
그런 태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나서 내가 드는 생각은,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불쾌함 혹은 불편함을 느꼈을 때 그것이 내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꽤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불공정함? 부도덕함? 비사회적임? 등등의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극단적으로 나간다면 한 인간에 대한 가치판단은 그냥 개인적인 호불호에 불과할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호불호일까? 예를 들어 어떤 어른이 자신의 자식의 손을 붙잡고 길 가는 어떤 환경미화원을 보면서 '너는 커서 저렇게 되면 안 된다'라고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할텐데, 이것은 그저 호불호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떠오르는 것은 '인생은 짧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쏟는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에 거슬리고 불편한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라'라는 어떤 입장에 대한 것인데, 이 입장 전부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납득되는 부분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의 거슬리는 측면(그것이 나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만 보고 그 사람의 판단을 모두 끝내버리고 그대로 관계를 종결하는 것은 너무 인간의 가능성을 좁게 보는 일이 아닐까? (과거의 나는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서술했을 것인데, 그냥 개인과 개인의 사적인 관계에 한해서는 비윤리적이라고 단언하는 일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인간에 대한 판단을 고정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것을 서글픈? 쓸쓸한? 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쉽사리 판단을 고정시키지 않고 싶다, 쉽사리 관계를 끊고 싶지 않다, 이런 바람이 내가 미움받는 일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관계에 있어 단호하지 못하다는 측면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물론 이런 바람 모두가 내가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 트라우마와 연관되는 것은 아니긴 할 것이다.
어쨌든 요약하자면 나의 고민은 이렇다. 나의 비합리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을까, 또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열망하는 것 같다. 이러한 열망에는 물론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싶다는 사적인 것이 개입되어 있지만, 그래도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 왜냐하면 나는 윤리적이고 착한 사람 몇몇을 내 짧은 인생에서 만나볼 행운이 있었고(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했든 아니면 책을 통해 그 사람 자체라고 생각되는 그 사람의 철학이든) 그 행운 덕분에 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엇을 설명하든 무엇을 주장하든 그 근원을 파헤치면 그 자체로서만 합리화될 수밖에 없는, 그 자체로서만 정당화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는데, 나에게 있어 그것은 삶과 희망 같은 긍정성인 것 같다. (나는 부정적인 만큼 긍정적이고 긍정적인 만큼 부정적이다. 나는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고 살고 싶은 만큼 죽고 싶은 것 같다.)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게 좋은 이유를 합리화하자면 결국에는 '윤리적인 사람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이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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