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0일
1. 제목은 1월 20일이라고 썼지만 수요일에 있던 일이다.
오랜만에 B를 만났다. B는 나를 보자마자 코 수술이 너무 잘 됐다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우리는 점심으로 초밥을 먹었다. 김태완스시라는, 길 가다가 한 번 가봐야지 생각만 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갔다. 거기서 점심을 먹으면서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학교 가는 버스를 타면서 B가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지금까지 마누라인 J 빼고는 아무도 안 만났다가 나를 만나서 반갑다는 이야기, 철학과 이야기와 제3세계 한국인인 우리가 학문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격과 어려움 등등을 이야기했다. B와 이야기하면서 B에게 애틋함을 느끼면서 B가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에 도착해서 B가 지도교수 면담을 가기 전까지 학교 안에 있는 파스쿠찌에서 마실 것을 시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너무나 하고 싶었기에 나는 B에게 요즈음 생각하고 있는 골칫거리에 대해 털어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B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놈의 정을 버려, 라고. B는 내가 B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가 버리라고 한 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그렇게 말한 게 재미 있어서, 그리고 맞는 지적이어서 나는 그래야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B에게 나중에 다시 만나서 밥 먹자고 기약한 다음에 헤어졌다.
B와 했던 이야기 중에 B의 마누라인 J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내가 우스갯소리로 J를 매도한(?) 일침들에 깔깔 웃으면서 B가 꼭 저녁에 J를 만나면 내가 지금 했던 이 말들을 하라고 했다. B가 굳이 그 이야기를 하라고 시키지 않았어도 나는 친구들을 만나서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J에게 B랑 했던 이야기를 전하려고 마음 먹긴 했었다. 세미나 뒷풀이 후 J는 다른 남편 H를 만나러 간다고 해서 (놀고 싶었던) 나는 그를 따라갔다. 따라가면서 나는 J에게 B랑 했던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구사해버리고 말아서 자기 혐오에 빠지곤 하는 남성적 언어와, 제3세계인인 한국인이 제1세계의 학문을 한다는 것에 대한 것, 등등. J는 좋은 리스너이기 때문에 나의 주절거림을 들어주었다. 나의 주절거림은 H의 집에 들어가서도 계속 이어졌다.
H는 힘들었는지 자고 있었고,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나와 J가 떠들 때 가끔씩 고개를 흔들거나 젓거나 하는 정도의 반응만 했었다. 그후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는지 그도 이야기에 참여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독서실 근처에 맛이 있는 밥집을 찾기 힘들다, 심지어 짬뽕도 별로 맛이 없어서 먹는 내내 차이나당 짬뽕이 그리웠다는 말을 했다. 나의 경우 그냥 수다의 일부로 하는 징징댐인데, H에겐 피곤한 어리광과 징징거림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내가 이 징징댐을 하기 전에 H는 요새 내가 바쁘고 힘이 없기 때문에 나나 다른 친구 Y랑 트러블이 일어나도 관계를 수습할 수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나와 Y가 자기를 붙잡아야 한다고 말한 참이었다. 피곤한 H에게 나의 말은 피로감을 더 얹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H는 짜증을 냈다. 네가 바라는 것은 네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찾기 힘들다, 불가능한 바람을 유지하는 것은 너를 불행하게 만든다, 왜 불행을 자초하느냐, 그리고 그렇게 자초한 불행에 대해 징징대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너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봐라, 그냥 하는 말이라면 이제 하지 말아라, 이제 어른답게 굴어라, 내가 기억하는 H의 말은 대충 이 정도이다. 나는 약간 모르겠는 상태로, 그러나 H가 무언가 짜증이 나 있다는 눈치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H의 집에서 나왔다. J는 담배를 피우러 같이 따라 나왔다. 나도 J와 함께 담배를 피웠다.
어쨌든 H의 말은 짜증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그것이 사소한 이유에서 촉발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짜증은 늘 그렇게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J에게 불쾌감을 토로했다. J는 나를 달래 주었다. J가 너무 신경 쓸까봐, 나는 담배를 다 피우고 J를 안아주면서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말했다. 물론 신경을 안 쓸리가 없겠지만은, 그때는 그랬다. 나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고, 엄마한테서 좀 일찍일찍 다니고 내일 오빠 면접이니까 조용히 집에 들어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J가 좋다는 생각을 하고, H의 말을 곱씹으면서 불쾌함과 슬픔을 느꼈다. 나는 몇 달 전에 H가 당황할 만하게 H에게 짜증을 낸 적이 있고, H를 몰아붙힌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H에게 다시 미안했고, H를 이해하면서도, 어쨌든 불쾌함과 슬픔이 그러한 생각들로 싹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울했다. H의 짜증은 이제껏 나의 행태와 말들로 차곡차곡 누적되다가 아까 전의 사소한 계기로 촉발된 것일 게다. 나는 H에게 편한 친구가 못 되었었구나, 그리고 당분간 편한 친구로 있어줄 수가 없겠구나 싶어서 슬펐다.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곱씹어 보면서 내게 일어난 상실을 슬퍼했다.
2. 코 수술 이후 엄마는 나를 가지고 약간은 인형 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에게 머리스타일을 좀 바꿔 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나는 당연하게도 머리를 기르는 일에 대해 완강히 거부했고, 나의 의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엄마는 잘 알기 때문에 숏컷인데 머리를 옆으로 넘겨서 여성스러운 숏컷을 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가 내가 옛날에 아주 환장했던 엠버도 그런 머리를 한다, 라는 이야기로 나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너무 웃겼다.
H는 엄마와 나의 병적인 관계를 지적했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엄마는 어느 정도받아들이고 인정했는데, 내가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엄마의 (자기 컴플렉스와도 연관 있는) 자의적 기준으로 나를 여성스럽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엄마에게 희생하려고 하는 경향성이 있어서, 나를 생각하지 않고 엄마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요구에 꽤 많이 흔들리기 때문에 H는 나와 엄마의 관계를 병적이라 규정한 것 같다.
그런 지적을 듣고 나서 언제 길을 걷다가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사실, 내가 엄마에게 상당히 훼손 당했고 그 훼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훼손 때문에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엄마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렸다. 엄마가 나를 훼손했다는 것에서 엄마에게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직장 생활에 지친 엄마가 나를 낙태하려고 마음 먹었다는 사실에 병적으로 흥분하고 엄마가 나를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낳고 보니 딸이었고 엄마는 무척이나 딸을 갖고 싶어했기 때문에 오빠 낳았을 때도 하지 않았던, 주변 사람들에게 기뻐서 한턱 쐈다는 이야기를 해줬을 때 병적으로 기뻐했다. 내가 특별해지는 서사를 엄마가 마련해줘서 나는 병적으로 행복했던 것이다. 내가 마조히스트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정했다. 인정하고 나서 우울했나? 우울했다. 왜 우울할까? 그것은 모르겠다. 나는 늘 쉽게 우울해하니까 아무래도 상관 없을 것 같지만.
3. (드디어 1월 20일에 대한 것이다) 일어나고 나서 어제 정신과에서 받았던 약들을 먹었다. 늘 먹던 항우울제에 중추 신경 흥분제(ADHD 치료제라고 한다)였다. 먹고 나서 과외 시범수업을 하러 나갔다. 오늘도 여전히 슬펐다. 이 슬픔에는 H에게 들었던 짜증의 탓이 컸다. 그런데 그 짜증은 이제 내 스스로 너무 곱씹어서 너덜너덜해질 정도였고, 그래서 이미 원본에서는 한참 멀어진 어떤 것으로 변질되었다.
과외 집에 들어가니 학생은 없었고 어머니만 계셨다. 과외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고 영업용 얼굴을 하면서 앞으로 수업은 이렇게 할 것이고 등등을 이야기했다. 끝나고 나서 맥도날드에 가서 불고기버거 세트를 먹었다. 평창올림픽 때문인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불고기버거 세트 할인행사를 하고 있었다. 버거를 먹고 독서실로 갔다.
독서실에 가서 독일어단어를 아주 조금 외우고, 아도르노 부정변증법을 읽다가 버틀러와 앚타나시오우의 대담집인 <박탈>을 읽었다. 읽는 중간에 엄마한테서 오는 길에 김밥을 사달라는 부탁을 받고, 엄마의 부탁을 핑계 삼아 독서실에서 일찍 나왔다. 김밥을 먹고 방에 들어와서 <박탈>을 더 읽다가, 슬퍼하다가, 트위터를 하다가, 웹 서핑을 하다가,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여전히 머리가 약간 아프고 슬프다. 이만 줄인다.
오랜만에 B를 만났다. B는 나를 보자마자 코 수술이 너무 잘 됐다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우리는 점심으로 초밥을 먹었다. 김태완스시라는, 길 가다가 한 번 가봐야지 생각만 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갔다. 거기서 점심을 먹으면서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학교 가는 버스를 타면서 B가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지금까지 마누라인 J 빼고는 아무도 안 만났다가 나를 만나서 반갑다는 이야기, 철학과 이야기와 제3세계 한국인인 우리가 학문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격과 어려움 등등을 이야기했다. B와 이야기하면서 B에게 애틋함을 느끼면서 B가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에 도착해서 B가 지도교수 면담을 가기 전까지 학교 안에 있는 파스쿠찌에서 마실 것을 시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너무나 하고 싶었기에 나는 B에게 요즈음 생각하고 있는 골칫거리에 대해 털어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B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놈의 정을 버려, 라고. B는 내가 B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가 버리라고 한 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그렇게 말한 게 재미 있어서, 그리고 맞는 지적이어서 나는 그래야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B에게 나중에 다시 만나서 밥 먹자고 기약한 다음에 헤어졌다.
B와 했던 이야기 중에 B의 마누라인 J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내가 우스갯소리로 J를 매도한(?) 일침들에 깔깔 웃으면서 B가 꼭 저녁에 J를 만나면 내가 지금 했던 이 말들을 하라고 했다. B가 굳이 그 이야기를 하라고 시키지 않았어도 나는 친구들을 만나서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J에게 B랑 했던 이야기를 전하려고 마음 먹긴 했었다. 세미나 뒷풀이 후 J는 다른 남편 H를 만나러 간다고 해서 (놀고 싶었던) 나는 그를 따라갔다. 따라가면서 나는 J에게 B랑 했던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구사해버리고 말아서 자기 혐오에 빠지곤 하는 남성적 언어와, 제3세계인인 한국인이 제1세계의 학문을 한다는 것에 대한 것, 등등. J는 좋은 리스너이기 때문에 나의 주절거림을 들어주었다. 나의 주절거림은 H의 집에 들어가서도 계속 이어졌다.
H는 힘들었는지 자고 있었고,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나와 J가 떠들 때 가끔씩 고개를 흔들거나 젓거나 하는 정도의 반응만 했었다. 그후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는지 그도 이야기에 참여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독서실 근처에 맛이 있는 밥집을 찾기 힘들다, 심지어 짬뽕도 별로 맛이 없어서 먹는 내내 차이나당 짬뽕이 그리웠다는 말을 했다. 나의 경우 그냥 수다의 일부로 하는 징징댐인데, H에겐 피곤한 어리광과 징징거림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내가 이 징징댐을 하기 전에 H는 요새 내가 바쁘고 힘이 없기 때문에 나나 다른 친구 Y랑 트러블이 일어나도 관계를 수습할 수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나와 Y가 자기를 붙잡아야 한다고 말한 참이었다. 피곤한 H에게 나의 말은 피로감을 더 얹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H는 짜증을 냈다. 네가 바라는 것은 네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찾기 힘들다, 불가능한 바람을 유지하는 것은 너를 불행하게 만든다, 왜 불행을 자초하느냐, 그리고 그렇게 자초한 불행에 대해 징징대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너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봐라, 그냥 하는 말이라면 이제 하지 말아라, 이제 어른답게 굴어라, 내가 기억하는 H의 말은 대충 이 정도이다. 나는 약간 모르겠는 상태로, 그러나 H가 무언가 짜증이 나 있다는 눈치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H의 집에서 나왔다. J는 담배를 피우러 같이 따라 나왔다. 나도 J와 함께 담배를 피웠다.
어쨌든 H의 말은 짜증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그것이 사소한 이유에서 촉발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짜증은 늘 그렇게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J에게 불쾌감을 토로했다. J는 나를 달래 주었다. J가 너무 신경 쓸까봐, 나는 담배를 다 피우고 J를 안아주면서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말했다. 물론 신경을 안 쓸리가 없겠지만은, 그때는 그랬다. 나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고, 엄마한테서 좀 일찍일찍 다니고 내일 오빠 면접이니까 조용히 집에 들어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J가 좋다는 생각을 하고, H의 말을 곱씹으면서 불쾌함과 슬픔을 느꼈다. 나는 몇 달 전에 H가 당황할 만하게 H에게 짜증을 낸 적이 있고, H를 몰아붙힌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H에게 다시 미안했고, H를 이해하면서도, 어쨌든 불쾌함과 슬픔이 그러한 생각들로 싹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울했다. H의 짜증은 이제껏 나의 행태와 말들로 차곡차곡 누적되다가 아까 전의 사소한 계기로 촉발된 것일 게다. 나는 H에게 편한 친구가 못 되었었구나, 그리고 당분간 편한 친구로 있어줄 수가 없겠구나 싶어서 슬펐다.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곱씹어 보면서 내게 일어난 상실을 슬퍼했다.
2. 코 수술 이후 엄마는 나를 가지고 약간은 인형 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에게 머리스타일을 좀 바꿔 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나는 당연하게도 머리를 기르는 일에 대해 완강히 거부했고, 나의 의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엄마는 잘 알기 때문에 숏컷인데 머리를 옆으로 넘겨서 여성스러운 숏컷을 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가 내가 옛날에 아주 환장했던 엠버도 그런 머리를 한다, 라는 이야기로 나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너무 웃겼다.
H는 엄마와 나의 병적인 관계를 지적했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엄마는 어느 정도받아들이고 인정했는데, 내가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엄마의 (자기 컴플렉스와도 연관 있는) 자의적 기준으로 나를 여성스럽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엄마에게 희생하려고 하는 경향성이 있어서, 나를 생각하지 않고 엄마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요구에 꽤 많이 흔들리기 때문에 H는 나와 엄마의 관계를 병적이라 규정한 것 같다.
그런 지적을 듣고 나서 언제 길을 걷다가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사실, 내가 엄마에게 상당히 훼손 당했고 그 훼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훼손 때문에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엄마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렸다. 엄마가 나를 훼손했다는 것에서 엄마에게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직장 생활에 지친 엄마가 나를 낙태하려고 마음 먹었다는 사실에 병적으로 흥분하고 엄마가 나를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낳고 보니 딸이었고 엄마는 무척이나 딸을 갖고 싶어했기 때문에 오빠 낳았을 때도 하지 않았던, 주변 사람들에게 기뻐서 한턱 쐈다는 이야기를 해줬을 때 병적으로 기뻐했다. 내가 특별해지는 서사를 엄마가 마련해줘서 나는 병적으로 행복했던 것이다. 내가 마조히스트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정했다. 인정하고 나서 우울했나? 우울했다. 왜 우울할까? 그것은 모르겠다. 나는 늘 쉽게 우울해하니까 아무래도 상관 없을 것 같지만.
3. (드디어 1월 20일에 대한 것이다) 일어나고 나서 어제 정신과에서 받았던 약들을 먹었다. 늘 먹던 항우울제에 중추 신경 흥분제(ADHD 치료제라고 한다)였다. 먹고 나서 과외 시범수업을 하러 나갔다. 오늘도 여전히 슬펐다. 이 슬픔에는 H에게 들었던 짜증의 탓이 컸다. 그런데 그 짜증은 이제 내 스스로 너무 곱씹어서 너덜너덜해질 정도였고, 그래서 이미 원본에서는 한참 멀어진 어떤 것으로 변질되었다.
과외 집에 들어가니 학생은 없었고 어머니만 계셨다. 과외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고 영업용 얼굴을 하면서 앞으로 수업은 이렇게 할 것이고 등등을 이야기했다. 끝나고 나서 맥도날드에 가서 불고기버거 세트를 먹었다. 평창올림픽 때문인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불고기버거 세트 할인행사를 하고 있었다. 버거를 먹고 독서실로 갔다.
독서실에 가서 독일어단어를 아주 조금 외우고, 아도르노 부정변증법을 읽다가 버틀러와 앚타나시오우의 대담집인 <박탈>을 읽었다. 읽는 중간에 엄마한테서 오는 길에 김밥을 사달라는 부탁을 받고, 엄마의 부탁을 핑계 삼아 독서실에서 일찍 나왔다. 김밥을 먹고 방에 들어와서 <박탈>을 더 읽다가, 슬퍼하다가, 트위터를 하다가, 웹 서핑을 하다가,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여전히 머리가 약간 아프고 슬프다.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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