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5일

(쓰다 말았는데 더 이상 쓰기 귀찮아서 미완성 상태로 게시함)

토요일 저녁에 준호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이야깃거리 중 하나는 학자로서의 마인드셋이었다. 작금의 신자유주의 영향 아래에 있는 제3세계 한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전문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돈도 못 버는 불안정한 직업을 택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이유로서 보통 학자가 되려는 이들은 두 가지 마인드셋을 장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신을 투사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숭고한 사명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혹은 아주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으로. 다른 하나는 자기가 하는 일을 덕질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말고 제 3의 마인드셋은 준호와 함께 골똘히 생각해봐도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저 두 마인드셋을 떠올리고 나는 준호한테 말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숭고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 자신을 투사로서 규정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는 일이 즐겁지는 않다. 나는 정말 그렇다. 나는 철학 연구자가 되기 위해 머리 빠지도록 책을 읽고 원전을 읽기 위해 영어, 독일어를 눈물 나게 공부해야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전혀 '덕질'로 느껴지지 않는다. 덕질은 쉽잖아. 그리고 즐겁다. 하지만 학문을 하는 건 어렵고 힘들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떠오른 것은 덕질을 위해 제2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퍼뜩 깨달았다. 나는 덕질을 위해 공부를 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아무리 봐도 나는 일본어 실력이 썩 향상하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내가 덕질을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철학 공부하는 것을 덕질로 규정했을까? 그랬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학자가 되려고 하는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을 철학으로서 설득력 있게 하고 싶고, 그것을 학계라는 제도권 안에서 인정 받을 만한 형태로 하고 싶기 때문에 학위를 따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숭고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내가 목표하는 바를 이루는 과정이 즐겁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왜 하필 철학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걸까? 문학으로 하는 방법도 있고 예술로 하는 법도 있는데? 어쩌면 문학이나 예술로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쉬울까? 오히려 철학으로 하는 게 더 쉽고 문학이나 예술로 하면 더 힘들어서 더 많이 울고 좌절하지 않을까? 이런 말들을 준호에게 쏟아냈다. 이에 대해 준호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경석이와 술을 마시면서 한 이야기인데, 철학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주변에 개념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문학 속 인물들이 그/녀의 주변에 같이 산다고. 그러면서 준호는 나한테 에쎌찡은 개념들과 함께 살고, 철학적 개념들을 가지고 사유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가? 싶으면서도 그런 거 같다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준호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들은 재미 있고 유익했다. 친구와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않더라도 보통 친구와 보내는 시간은 의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친구와 재미 있고 유익한 이야기를 나누면 그 친구와 보낸 시간이 특히 가치 있게 느껴진다. 이번 토요일 저녁의 만남이 그랬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생각했다. 나는 자의식이 큰 사람이다. 자의식이 크니까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의식하게 되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의식하게 되고 남들의 얼굴과 몸짓에도 의식하게 되니까 쉽게 피로해지는 것 같다. 예민함은 자의식 과잉에서 오고, 동시에 자의식 과잉은 예민함을 촉발한다.

너는 왜 그렇게 생겨 먹었어? 같은 질문을 숱하게 받았거나, 특이하다고 박해 받고 따돌림 당하거나, 기타 등등의 사유로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의식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즉 소수자의 자의식은 원하든 원치 않든 무럭무럭 자라게 되어 있다...

자의식이 커지면, 나 자신을 천히 여기는 동시에 귀하게 생각하게 된다. 나를 천시하게 되는 이유는 너무 자명한데, 일단 나는 남이 모르는 내 생각과 감정과 모습 등을 알 수 있고 그것들 대부분은 추악하거나 못생겼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는 그런 추악하거나 못생긴 부분을 보지 못하거나 혹은 거기에 큰 실망을 갖지 않는데 반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이는 그런 부분들을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고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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