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5일

1. n년 전 야심한 시각에 광역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야심한 시각이다보니 취객 비율이 꽤 높았는데, 집에 도착하기 몇 정거장 전부터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서 복도 쪽을 보니 취객의 토사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건더기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아무튼 위액과 술이 섞인 액체가 내는 냄새가 온 버스에 진동했고 그 토사물을 뱉은 취객은 당연히 취객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토사물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그냥 내렸다... 버스 기사님은 그 취객한테 아니 이대로 해 놓고 가시면 어떡해요 그냥 토해놓고 내리기만 하면 다예요? 라고 억울하게 항변했지만 그 취객은 진짜 제 발로 걷는 게 용할 정도로 이성을 잃은 상태여서 죄송하다는 말도 없이 내렸다... 버스 기사님은 몇 번이고 욕을 내뱉다가 버스에 남은 몇 명의 승객(나 포함)에게 잠시 슈퍼 좀 들르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락스를 사들고 왔다... 승객들이 다 내리고 차고지에서 그 버스 기사님은 자기 책임이 1나도 없는 그 토사물을 치울 수밖에 없겠지...

어쨌든 대책 없이 흐르는 토사물과 그것이 내는 불쾌한 냄새와 억울하고 빡친 기사님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왜 갑자기 그때의 가엾은 버스 기사님이 떠올랐더라? 아마 오늘 정신병원 갔다가 카페로 가는 길에서 억울함과 답답함에 대해 곱씹다가 내 기억 한켠에 있던 그 일화가 툭 튀어나왔던 것 같다. 수없이 많은 억울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2. 오늘 아침에 정신병원에 간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이 분이 내 정신병 주치의가 된 지는 대략 3년 정도인데 오늘 아침에 받은 진료가 최장 진료였다. (그 때문인지 내가 진료실을 나오니 대기하는 환자들이 참 많았다..) 오늘 진료 때 처음으로 주치의 분께 가장 취약한 모습을 보였던거 같은데 그러니까 그 분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말하면서 질질 짰다는 말이다...

"님은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서 자기 객관화도 잘 되고 되게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다만 에너지가 없어서 몸이 안 따라주는 것 뿐입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요지의 말을 1억번 정도 듣고 나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대답만 했다. (우느라 말을 잘 못하는 상태이기도 했다) 어쨌든 주치의 분은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지금 다 하고 있는 상태이고 정신력이 고갈된 문제는 의사가 해결할 몫이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시험 잘 보세요 라고 말해서 많이 위로가 됐다... 비상약도 받았고... 어쨌든 아침부터 제2의부모인 정신과 주치의에게 이내 사연 들어보소 한풀이하느라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약국 가서 약 받고 버스 타고 집 근처 카페로 갔다.

그래도 예전보다 내가 좀 더 정신적으로 튼튼해진 걸 실감한게, 눈이 부은 채로 카페로 걸어가는 길에 날씨가 참 좋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단골 카페의 커피도 맛있었고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면서 낄낄댔고 오늘 도착한 라빗츠 누이구루미도 너무 귀여웠고 아무튼 아주 슬프고 힘든 상황에서도 나 자신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3. 이제껏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움을 받으면 나중에 도움을 은연히 기대하게 될 것이고 사람들을 원망할까봐 라고 연숙이가 일기에 그렇게 썼던 거 같은데 그 문장을 곱씹고 있다. 나의 경우 도움을 받았는데 재기(사전적 의미)에 실패해서 도움을 준 사람들을 실망시킬까봐 도움을 받는 게 무서운 거 같다.

아무튼 어제 몇몇 친구들이 아주 걱정을 해 주면서 힘내라고 기프티콘을 보내줬는데,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나를 아껴준다는 게 기쁘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응원을 받았음에도 재기(여전히 사전적 의미)에 실패할까봐 무섭다... 그런데 나를 아끼고 걱정해주는 친구들이 설사 내가 재기(이하동문)에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이성의 끈을 생명줄처럼 붙잡고 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내게 질풍같은 용기를... 노력상이라도 해도 니쨩이 잔뜩 칭찬해줄테니까... 이런 시대에선 노력과 시간을 들이나마나 별반 다름이 없어도 그 차이를 알아주는 사람은 분명히 있으니까... 정말 고마워 모두의 응원이 용기를 줘 이 가슴에... (온갖 힘나는 노래 가사 곱씹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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