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4일
(사실은 10월 3일 일기임)
개천절에 외할머니 병문안 갔는데 이제 수술 후 간병+재활치료를 위해 일산 등지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모양이었다. 척추 신경에 문제가 생겨서 팔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셨는데 많이 아프신지 여름에 뵀던 것보다 더 야위고 초췌해 보이셨다... 내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할머니는 슬퍼 보였다. 엄마는 내 옆에 서서 여기 병원 어떻냐 뭐 필요한 거 없냐 물으면서 이 자리를 견디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할머니는 뭐라 뭐라 대답했다.
좀 앉아 있다 보니까 어디선가 똥 냄새가 났다. 할머니가 싼 걸까? 싶었는데 옆 침대 할머니가 싼 것이었다. 간병인이 새 기저귀로 갈아주는데 옆 침대 할머니가 좀 냄새날 수 있어요 라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나는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다... 비위가 강한 편이기도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기저귀에 지린 본인이 더 불쾌할 것이고 사람이 똥을 싸면 냄새가 나는 법이지...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쨌든 병문안은 한 시간 정도로 끝났다. 할머니가 이제 가라고 두 번이나 말했을 때 엄마랑 나는 병실을 나왔다. 할머니가 계속 내 손을 자기 가슴께에 가져다가 주물거리는 것이 생각나는데 그때 나는 할머니의 가슴이 너무 앙상해서 갈비뼈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생경했었다. 아빠는 복도에 있는 휴게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병원 원칙상 두 명까지 병실에 들어갈 수 있다) 무슨 집에 그냥 빨리 가서 야구를 볼 것이지 조금만 더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서 엄마랑 나는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갔다. 이디야가 있어서 거기로 갔다. 내가 커피 사줄까? 하고 물으니까 엄마가 여기까지 왔는데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나)와 카페라떼(엄마)와 생크림 와플을 시켰다.
자리에 앉아서 할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엄마한테 "엄마가 죽고 싶으면 스위스 데려다 줄게 거기는 2천만원에 안락사를 할 수 있대 만약 살고 싶으면 그때 돈 많이 있으면 좋은 요양원 데려다주고"라고 말했는데 엄마는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자기의 엄마, 즉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나중에 저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동시에, 자기가 외할머니에게 품는 생각과 감정들을 자기의 자식들이 똑같이 느낄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품위를 잃어버린 짐덩이가 되는 게 엄마한테는 몹시 끔찍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겠지만) 그래서 거기에 대해 내가 쿨하게 반응하니까 (물론 말뿐인 약속이 될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내 나이 때 엄마는 그렇게 쿨할 순 없었기 때문에... (부모만 봐도 속 터지는 것을 억누를 수 없다고 했으니)
아빠는 뭐 졸라 오래 TV를 볼 것처럼 굴어 놓고 30분도 채 되지 않아 우리가 있는 카페로 왔다. 엄마가 나중에 몸을 못 가누게 될 때 엄마가 죽고 싶든 살고 싶든 도와주겠다 라는 이야기를 끝내고 내 대학원 입시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저번에 엄마랑 싸우고 나서 화해하려고 쌀국수 먹었을 때 내가 이야기했던 것과 외할머니를 보면서 빨리 저렇게 되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야겠다라는 깨달음을 얻어서인지 엄마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이제 걱정도 안 할 거고 눈치도 안 줄게 라는 이야기도 했었다.
어쨌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고 집에 와서 왓챠로 모브사이코100 1기를 다 보고 저녁 먹고 산책을 한 시간 정도 했다. 공부는 1나도 하지 않았다.
개천절에 외할머니 병문안 갔는데 이제 수술 후 간병+재활치료를 위해 일산 등지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모양이었다. 척추 신경에 문제가 생겨서 팔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셨는데 많이 아프신지 여름에 뵀던 것보다 더 야위고 초췌해 보이셨다... 내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할머니는 슬퍼 보였다. 엄마는 내 옆에 서서 여기 병원 어떻냐 뭐 필요한 거 없냐 물으면서 이 자리를 견디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할머니는 뭐라 뭐라 대답했다.
좀 앉아 있다 보니까 어디선가 똥 냄새가 났다. 할머니가 싼 걸까? 싶었는데 옆 침대 할머니가 싼 것이었다. 간병인이 새 기저귀로 갈아주는데 옆 침대 할머니가 좀 냄새날 수 있어요 라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나는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다... 비위가 강한 편이기도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기저귀에 지린 본인이 더 불쾌할 것이고 사람이 똥을 싸면 냄새가 나는 법이지...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쨌든 병문안은 한 시간 정도로 끝났다. 할머니가 이제 가라고 두 번이나 말했을 때 엄마랑 나는 병실을 나왔다. 할머니가 계속 내 손을 자기 가슴께에 가져다가 주물거리는 것이 생각나는데 그때 나는 할머니의 가슴이 너무 앙상해서 갈비뼈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생경했었다. 아빠는 복도에 있는 휴게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병원 원칙상 두 명까지 병실에 들어갈 수 있다) 무슨 집에 그냥 빨리 가서 야구를 볼 것이지 조금만 더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서 엄마랑 나는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갔다. 이디야가 있어서 거기로 갔다. 내가 커피 사줄까? 하고 물으니까 엄마가 여기까지 왔는데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나)와 카페라떼(엄마)와 생크림 와플을 시켰다.
자리에 앉아서 할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엄마한테 "엄마가 죽고 싶으면 스위스 데려다 줄게 거기는 2천만원에 안락사를 할 수 있대 만약 살고 싶으면 그때 돈 많이 있으면 좋은 요양원 데려다주고"라고 말했는데 엄마는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자기의 엄마, 즉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나중에 저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동시에, 자기가 외할머니에게 품는 생각과 감정들을 자기의 자식들이 똑같이 느낄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품위를 잃어버린 짐덩이가 되는 게 엄마한테는 몹시 끔찍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겠지만) 그래서 거기에 대해 내가 쿨하게 반응하니까 (물론 말뿐인 약속이 될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내 나이 때 엄마는 그렇게 쿨할 순 없었기 때문에... (부모만 봐도 속 터지는 것을 억누를 수 없다고 했으니)
아빠는 뭐 졸라 오래 TV를 볼 것처럼 굴어 놓고 30분도 채 되지 않아 우리가 있는 카페로 왔다. 엄마가 나중에 몸을 못 가누게 될 때 엄마가 죽고 싶든 살고 싶든 도와주겠다 라는 이야기를 끝내고 내 대학원 입시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저번에 엄마랑 싸우고 나서 화해하려고 쌀국수 먹었을 때 내가 이야기했던 것과 외할머니를 보면서 빨리 저렇게 되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야겠다라는 깨달음을 얻어서인지 엄마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이제 걱정도 안 할 거고 눈치도 안 줄게 라는 이야기도 했었다.
어쨌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고 집에 와서 왓챠로 모브사이코100 1기를 다 보고 저녁 먹고 산책을 한 시간 정도 했다. 공부는 1나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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