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7일
1.
신경안정제+수면유도제까지 추가로 받고 온 날 저녁, 엄마가 다 같이 산책을 가자고 해서 게임을 하다 말고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덥썩 나갔는지 모르겠다. 산책이 엄청나게 싫은 건 아니었고, 가기 싫다고 하면 운동도 안 하고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나간 것 같기도 하다.
엄마와 아빠, 오빠, 그리고 우리집 개가 저 멀리 앞서 걷고 있었고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견디려고 애썼다. 막 나갔을 때는 괜찮았는데, 대학원 진학 관련으로 멘토링을 해야 한다는 문자를 받고 부모와 오빠의 이야기를 듣는 게 괴로워지기 시작하자 더 이상 가족들이랑 '오붓하게' 산책을 하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내 걸음은 차츰 느려져서 나만 혼자 떨어져서 걸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잘 따라오는지 뒤돌아 보면서 "산책하기 힘들어?"라든지 "너 체력이 약해서 큰일 났다" 따위의 말을 건넸는데 그들은 내가 갑자기 기분이 썩창돼서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들 딴에는 그런 쓸데 없는 말을 건네면서 내가 우울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려고 그런 것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위로'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뭐라 대답하면 오열할 거 같아서 엄마와 아빠가 건네는 시덥잖은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머리가 다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억겁과 같은 기나긴 '가족과의 산책'이 끝나고 나는 그냥 집에서 저녁을 먹겠다고 말했다. 원래 엄마가 산책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산책 같이 나가면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였는데 애초에 맛있는 것을 얻어 먹으려고 나간 것도 아니었거니와 그 당시 내게 필요한 건 조용히 방구석에 처 박혀서 아무 것도 나를 자극하지 않는 안온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엄마와 오빠만 외식을 하러 나갔고, 아빠는 조용히 저녁을 먹는 나에게 와인을 두 번이나 권했다. 어디서 선물 받은 모양인지 소주만 마시는 아빠가 (소주가 제일 싸기 때문에) 와인을 꺼냈던 것이다. 술이라도 마시면서 마음을 달래라는 의도였을 터인데, 나는 술을 싫어하고 술 취하는 것도 싫기 때문에 거절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서 게임을 했다. 뭐라도 정신을 팔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자살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면서 내 자신의 상태가 정말로 개썩창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2.
신경안정제 겸 수면유도제는 효과가 아주 뛰어났다! 며칠째 잠을 푹 자고 있다. 덕분에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난다. 잠을 통해 의식을 완전히 꺼뜨리는 게 지금의 나로서는 최선의 휴식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 얼마 전에 15만원을 주고 수강한 독일어 B1 인터넷 강의를 듣고 (사실 독일어 빠가 상태라 강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강사님이 내뱉는 독일어 발음이 듣기 좋아서 어떻게든 수강하고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밀란 쿤데라 소설책을 읽거나 군나르 시르베크의 서양철학사 책 1권 읽다 남은 부분 조금 읽고 그런 식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 후에 과외가 있으면 과외를 하고, 과외 끝나고서는 저녁을 먹고 게임을 하고 자정 즈음에 약을 먹고 자고...
파이널판타지14에 오랜만에 접속하니 에오르제아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잘 지냈느냐 하는 안부인사를 건네왔다.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아 그나마 괜찮았던 옛 시절의 관성을 살려보자는 마음가짐으로 게임을 하는 거라서 그들의 반가움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물론 전 잘 지냈죠 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채팅으로 "누워 있었지만 잘 지냈답니다!"라는 답을 보냈다. 누워 있었다는 내 말에 어떤 친구분이 "많이 아프셨나봐요"라고 물어봤는데, 우울증이 너무 심했답니다 라는 말 대신 무기력해서 많이 누워있었다고 했더니 그분은 나를 쓰다듬으셨다. (파이널판타지14에는 감정표현 모션이 있다)
에오르제아 친구 중에서 유독 오래 알고 지내고 같이 게임 상에서 어울린 적이 많아 개인적인 연락처까지 주고 받은 친구 M이 있는데, 그분이랑 근황을 이야기했다. M은 쓰레기 같은 회사에 들어가 최저시급도 못 받는 상태로 혹사 당하고 있다고 했다... M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지금의 한국 사회는 미쳐 돌아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M에게 나는 대학원 삼수를 다시 하게 되었으며 삼수 실패하면 아마 공무원 준비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라고 말하니까 M은 "대학원 가셔서 최종적으로 뭘 하고 싶은 거예요?"라고 물었다. 나는 "학자요... 잘 되면 대학교수고 그럭저럭이면 시간강사고 망하면 고학력 백수가 되겠죠"라고 대답했다. (참고로 파이널판타지14의 게임 직업 중에 '학자'가 있고 나는 그걸 주력 직업으로 플레이한다...) 옛날에도 나는 M에게 파판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에서도 리얼 학자를 꿈꾼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M은 "잘 될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M과는 11월에 만나기로 했다. 파이널판타지14에서 M과 함께 잘 어울리는 에오르제아 친구분 S가 있는데, S도 11월에 자기 집으로 놀러 온다고 해서 그때 일정을 맞춰서 M의 집에 놀러갈 약속을 잡았다. S님은 게임 상에서만 봤지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기대가 됐다. 당장 자살을 생각하지만 (지금도 잔잔하게 자살을 생각하지만) 보고 싶은 사람들과 약속을 잡으려고 한다. 정말 11월까지만 잘 버티면 된다. 돈이 없는 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11월이 되면 다시 힘을 내서 알바를 구해보고 괜찮지 않은 상태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애써 괜찮은 척 하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요새는 웃음도 잃고 말도 잃었지만.
신경안정제+수면유도제까지 추가로 받고 온 날 저녁, 엄마가 다 같이 산책을 가자고 해서 게임을 하다 말고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덥썩 나갔는지 모르겠다. 산책이 엄청나게 싫은 건 아니었고, 가기 싫다고 하면 운동도 안 하고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나간 것 같기도 하다.
엄마와 아빠, 오빠, 그리고 우리집 개가 저 멀리 앞서 걷고 있었고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견디려고 애썼다. 막 나갔을 때는 괜찮았는데, 대학원 진학 관련으로 멘토링을 해야 한다는 문자를 받고 부모와 오빠의 이야기를 듣는 게 괴로워지기 시작하자 더 이상 가족들이랑 '오붓하게' 산책을 하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내 걸음은 차츰 느려져서 나만 혼자 떨어져서 걸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잘 따라오는지 뒤돌아 보면서 "산책하기 힘들어?"라든지 "너 체력이 약해서 큰일 났다" 따위의 말을 건넸는데 그들은 내가 갑자기 기분이 썩창돼서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들 딴에는 그런 쓸데 없는 말을 건네면서 내가 우울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려고 그런 것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위로'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뭐라 대답하면 오열할 거 같아서 엄마와 아빠가 건네는 시덥잖은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머리가 다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억겁과 같은 기나긴 '가족과의 산책'이 끝나고 나는 그냥 집에서 저녁을 먹겠다고 말했다. 원래 엄마가 산책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산책 같이 나가면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였는데 애초에 맛있는 것을 얻어 먹으려고 나간 것도 아니었거니와 그 당시 내게 필요한 건 조용히 방구석에 처 박혀서 아무 것도 나를 자극하지 않는 안온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엄마와 오빠만 외식을 하러 나갔고, 아빠는 조용히 저녁을 먹는 나에게 와인을 두 번이나 권했다. 어디서 선물 받은 모양인지 소주만 마시는 아빠가 (소주가 제일 싸기 때문에) 와인을 꺼냈던 것이다. 술이라도 마시면서 마음을 달래라는 의도였을 터인데, 나는 술을 싫어하고 술 취하는 것도 싫기 때문에 거절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서 게임을 했다. 뭐라도 정신을 팔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자살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면서 내 자신의 상태가 정말로 개썩창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2.
신경안정제 겸 수면유도제는 효과가 아주 뛰어났다! 며칠째 잠을 푹 자고 있다. 덕분에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난다. 잠을 통해 의식을 완전히 꺼뜨리는 게 지금의 나로서는 최선의 휴식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 얼마 전에 15만원을 주고 수강한 독일어 B1 인터넷 강의를 듣고 (사실 독일어 빠가 상태라 강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강사님이 내뱉는 독일어 발음이 듣기 좋아서 어떻게든 수강하고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밀란 쿤데라 소설책을 읽거나 군나르 시르베크의 서양철학사 책 1권 읽다 남은 부분 조금 읽고 그런 식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 후에 과외가 있으면 과외를 하고, 과외 끝나고서는 저녁을 먹고 게임을 하고 자정 즈음에 약을 먹고 자고...
파이널판타지14에 오랜만에 접속하니 에오르제아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잘 지냈느냐 하는 안부인사를 건네왔다.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아 그나마 괜찮았던 옛 시절의 관성을 살려보자는 마음가짐으로 게임을 하는 거라서 그들의 반가움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물론 전 잘 지냈죠 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채팅으로 "누워 있었지만 잘 지냈답니다!"라는 답을 보냈다. 누워 있었다는 내 말에 어떤 친구분이 "많이 아프셨나봐요"라고 물어봤는데, 우울증이 너무 심했답니다 라는 말 대신 무기력해서 많이 누워있었다고 했더니 그분은 나를 쓰다듬으셨다. (파이널판타지14에는 감정표현 모션이 있다)
에오르제아 친구 중에서 유독 오래 알고 지내고 같이 게임 상에서 어울린 적이 많아 개인적인 연락처까지 주고 받은 친구 M이 있는데, 그분이랑 근황을 이야기했다. M은 쓰레기 같은 회사에 들어가 최저시급도 못 받는 상태로 혹사 당하고 있다고 했다... M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지금의 한국 사회는 미쳐 돌아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M에게 나는 대학원 삼수를 다시 하게 되었으며 삼수 실패하면 아마 공무원 준비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라고 말하니까 M은 "대학원 가셔서 최종적으로 뭘 하고 싶은 거예요?"라고 물었다. 나는 "학자요... 잘 되면 대학교수고 그럭저럭이면 시간강사고 망하면 고학력 백수가 되겠죠"라고 대답했다. (참고로 파이널판타지14의 게임 직업 중에 '학자'가 있고 나는 그걸 주력 직업으로 플레이한다...) 옛날에도 나는 M에게 파판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에서도 리얼 학자를 꿈꾼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M은 "잘 될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M과는 11월에 만나기로 했다. 파이널판타지14에서 M과 함께 잘 어울리는 에오르제아 친구분 S가 있는데, S도 11월에 자기 집으로 놀러 온다고 해서 그때 일정을 맞춰서 M의 집에 놀러갈 약속을 잡았다. S님은 게임 상에서만 봤지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기대가 됐다. 당장 자살을 생각하지만 (지금도 잔잔하게 자살을 생각하지만) 보고 싶은 사람들과 약속을 잡으려고 한다. 정말 11월까지만 잘 버티면 된다. 돈이 없는 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11월이 되면 다시 힘을 내서 알바를 구해보고 괜찮지 않은 상태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애써 괜찮은 척 하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요새는 웃음도 잃고 말도 잃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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