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일

알람은 8시에 맞췄지만 일어난 건 8시 반이었다. 어차피 짐이 별로 없었으므로 더 자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몰라 일어났고, 머리를 감았다.
이틀 전부터 싸놓은 짐이 있긴 했다. 하지만 다시 풀러야 할 형편이었다. 어차피 부모님이 오실 때 커다란 가방을 몇 개 가져오실 것이다. 거기에다가 책을 쓸어담으면 되는데, 괜히 캐리어와 옆으로 매는 가방에 책을 쌓았다.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다시 쌌다. 옷걸이에 걸려있지 않은 옷을 접어서 캐리어에 밀어넣었고, 책장과 서랍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추려서 옆으로 매는 가방에 넣었다.
결국 10시 15분즈음에 다 쌌다. 부모님이 오시기로 한 것은 11시였다. 아침을 안 먹고 짐을 쌌는데 그러는 도중에 몇 번 현기증을 느꼈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이리저리 일을 해서 그런 거 같았다. 내려가서 간단히 때웠다. 1200원짜리 맛있는라면 컵. 이제는 못 먹을 것이다. 이 학교에 오지 않는 이상. 학교 매점 말고 이 라면을 파는 곳은 별로 없는 거 같았다. 설사 이 라면은 자주 볼 수 있어도 컵라면 자체를 먹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라면은 끓여먹겠지.
라면을 다 먹고 나서 기숙사로 올라가니 룸메의 아버지께서 오셨다. 룸메 책상과 침대 위에 커다란 비닐봉지에 싸여 있던 짐은 어느새 거실로 옮겨져 있었다. 나는 거실에 있었다.
부모님은 결국 11시 50분이 넘어서 왔다. 그 사이 룸메의 아버지와 룸메는 짐을 챙기고 나갔다. 마지막으로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냈다고 고맙다고 카톡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일기를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보내지 않았다. 내일 즈음 생각나면 보낼 것이다. 510호실에 나밖에 없자 나는 집안을 구경했다. 옆방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열린다. 그곳은 내가 사는 방과 냄새가 달랐다. 햇빛의 따스한 향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방 특유의 냄새. 짐이 하나도 없는 빈 방이었지만 내가 사는 방보다 더 더럽고 낡아보였다.
다시 내 방으로 갔다. 룸메 쪽 벽에 붙어 있던 코르크판이 보기 흉했다. 룸메 아버지께서 그걸 떼려고 하셨나 보다. 이상하게 뜯겨진 자국이 별로 좋은 꼴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부모님께 연락이 왔고, 우리는 짐을 다 챙기고 나왔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내가 싼 짐은 정말 별로 없었다. 룸메도 그렇고 옆방 언니들도 그렇고 짐이 한가득이었는데.
이제 방을 보러 혜화에 갔다. 3월 말 즈음부터 살게 될 자취방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전세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돈은 엄마의 전재산을 털어서 마련한 것이다. 솔직히 놀랐다. 나는 그저 자취 허락만 받고, 만약 가능하다면 보증금만 지원받아야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얘기를 꺼냈다.
그 돈은 엄마의 전재산이다, 라고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엄마와 엄마의 엄마, 즉 나의 할머니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엄마는 할머니와 그리 친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일하러 나가셨기 때문에, 이제 친해지려고 해도 서로 어색해서 다가갈 수 없다. 나와 너 사이 간의 관계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간. 그래서 전세금을 대주는 조건으로 한 달에 한 번 나와의 시간을 내어주길 바란다. 저번 주에 네가 선뜻 허락해줘서 같이 영화를 봤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네가 앞으로 바쁠 것이고 또한 내가 그렇게 외로울 줄 넌 잘 모를 것이다. 너한테 미안해서라도 쉽사리 시간을 내어달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이렇게 조건을 거는 것이다. 네 성격상 분명 이렇게 조건을 거는 게 마음이 편할 것이다.(실제로도 그랬다) 그리고 이렇게 조건을 걸어야 큰 돈이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라는 장황한 이야기였다.
나는 거기서 엄마한테 조금 감동했고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으나 후에는 살짝 씁쓸했다. 엄마가 이렇게 날 사랑할 줄은 몰랐고, 엄마는 참 서투른 사람이었으며, 이런 이야기를 내가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와의 대화를 포기했구나, 라는 반성.
사실 엄마와 친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꺼려진다. 내 진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아직 난 엄마를 신용하지 못하겠다. 가끔씩 엄마는 정말로 아이같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기적이고 남이 하는 말을 절대로 듣지 않고 죽어도 사과를 하지 않는. 하지만 사랑이 필요하고 외로운 사람. 앞으로 두고봐야 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래서 난 아빠한테 커밍하는 것이 오히려 엄마한테 하는 것보다 좋게 끝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아빠는 엄마보단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는 사이에 혜화에 도착했고, 우리는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점심을 먹었다. 돌솥비빔밥과 낙지비빔밥. 엄마아빠는 밥값이 싸다고 한다.
다 먹고나서 가까운 부동산부터 찾아갔다. 처음 찾아간 곳에는 전세가 하나도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대신 4000에 월 30하는 방은 있다고. 한 번 보러 갔는데 별로였다. 유일하게 좋은 것은 채광 뿐. 1층인데다가 방도 그닥이었다.
조금 더 걸어서 부동산을 발견했다. 자취방을 알아보러 왔다고 하니까 전세요, 월세요? 라고 묻는다. 전세요, 라고 아빠가 대답하니 서울대병원 근처에 하나 있단다. 엄마아빠는 단번에 화색이 돈다. 6500에 서울대병원 근처라니. 그리고 리모델링을 하고 있고 전자렌지까지 있다고 하니 더 좋다. 당장 알아보러 갔다. 그곳은 조용하면서도 큰 길목에 있었다. 확실히 통학에는 편할 것이다. 학교에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하지만 그 골목은 햇빛이 들지 않는다는 게 좀 걸렸다.
4층은 리모델링 중이라 볼 수는 없고, 대신 3층을 볼 수 있었다. 구조는 똑같단다. 확실히 리모델링을 끝낸 방이라 깔끔했다. 하지만 좀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아빠는 만족하신 듯 했다. 특히 아빠는. 그냥 여기로 계약할게요, 라고 아빠는 말했고 엄마도 같은 생각인지 별 말은 없었다. 이렇게 빨리 계약해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은 하지 못했다.
결국 건물주인 아주머니와 같이 부동산에 가서 계약. 계약서 작성 전까지 건물주 아주머니와 중개사와 엄마와 아빠는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건물주 아주머니의 성격은 엄마와 비슷했으나 더 심했다. 아주 철저한 사람. 하지만 난 철저한 사람이 좋다. 정직하게 철저한 사람은 좋다. 나는 정이란 이름 하에 민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한다.
엄마아빠는 친구 부부를 근처에서 보기로 해서 나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결국 중간에 꺼졌다. 버스를 타는 내내 정말 심심했다. 그래서 잠을 잤다.
집에 도착해서는 피자를 시켜먹었다. 그리고 컴퓨터로 자취에 필요한 것들을 살펴보았다. 재밌다. 처음으로 혼자 방을 얻어 산다는 것에 대한 기대와 불안과 묘한 고조를 느꼈다.
오지 말았으면 하는 3월의 첫째날은 그렇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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