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9일: 무의미함과 우스움
무의미함과 우스움
1. 무의미의 세계에 지나치게 빠져드는 건 좋지 않아요, 라는 친구의 조언을 흔쾌히 들었던 나는 계속 무의미함에 젖어들고 있다.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 중 몇 가지는 나의 고민, 나의 감정, 그리고 내가 그토록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았던 타인의 감정과 고민이다. 나의 고민이야 이렇다. 어떻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먹고 사는 데에도 지장이 없을까? 그 고민이 절실했던 시절에는 공부가 나한테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고, 그래서 대학원에 가서 쭉 공부하고 싶었다. 친구는 나를 두고 “정체성 공부하려고 철학과 온 애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내가 하려는 공부는 망할 게 뻔하며, 다른 길을 찾으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때의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라는 것은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는 덕질 정도의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무척이나 고민했으나 무의미함에 빠져든 나는 공부고 뭐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는 삶에 끌린다.
2.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버튼 투성이었고 그 버튼은 민감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이야 뭐 무의미함에 젖어서 버튼이 전보다야 둔감해졌다. (버튼이 없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버튼이 눌리는 일이야 당연히 가족이랑 젠더다. 감정적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 부모한테 오히려 집착했던 나는 이제 부모가 뭔 무심한 말을 하든지 나를 어떻게 상처 주는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이야 상하는데 그 상한 감정을 붙잡고 있어 봤자 뭐 하겠냐는 것이다. 나는 가족이 불편하고, 가족은 내 감정을 상하게 만들지만 어찌 되든 상관 없는 기분.
3. 그래서 그런지 상처만 핥으며 누구든지 자기를 건드리면 죽여버리겠다는 여린 사람,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안타까우면서도 우스워졌다. 이해를 못 해서 비웃는 게 아니다. 다만 계속 저렇게 상처를 핥고 있으면 낫지도 않고 감염되어서 곪기만 할 뿐이며 무엇보다 ‘재미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요새는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이랑 만나고 싶지 않다. 나 또한 평균 이상으로 진지한 사람이므로,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자기혐오일 수도 있다. 자기 혐오 따위의 지나친 의미 부여를 제쳐두고 그냥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은 재미가 없다. 웃기지 않다. 나는 요새 우스운 사람, 재미 있는 사람만 만나고 싶기 때문에 이 이유가 가장 명백하다.
페미니즘 학술 발표를 준비하다가 루저 문화와 남성성에 대한 논문을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 이 소개되어 있었다. 카니발의 웃음이야말로 내가 짓고 싶은 웃음, 친구와 내가 낄낄대고 싶은 우스움이다.
카니발은 주인과 관객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웃음의 세계이며, 그 속에서는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비하되며 웃음거리가 된다. 이 때 카니발의 웃음은 양면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찬양하는 듯 조롱하며, 욕을 하면서 칭찬한다. 또 비하되고 파괴된 낡은 세상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이 탄생과 합쳐진다. 카니발의 세계는 “마치 두 개의 몸을 가진 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바흐친, 2001: 631)이러한 양면성으로 인해 카니발의 웃음은 그것이 규범을 전복하는 혁명인지, 아니면 카니발이 끝나면 회귀하는 권력의 재확인인지에 대한 논쟁에 시달려왔다. 그러나 본 연구가 바흐친의 이론에서 주목하는 지점은 불확실한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로서의 웃음이다. 바흐친은 카니발의 웃음은 어떤 종류의 완결성과도 적대적이며 완성되지 않은 미래를 응시한다고 말한다. 웃음은 평가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의미는 한 방향으로 고정되지 않고 양가적으로 남는다. 바흐친은 이러한 양가적인 미완성 자체를 곧 세계의 총체성이라고 말하는데, 카니발의 웃음이란 바로 그러한 총체성을 인식하는 방식이자 세계관인 것이다. 바흐친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미완성의 세계에 스스로를 포함시켜 자신이 "완성되지 않는 총체적 세계에 관여하고 있음을 감촉"할 때 비로소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웃음이 세계의 총체성을 마주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개인의 두려움을 해소시킨다는 바흐친의 지적은 오늘날 루저문화에서 왜 그토록 웃음이 강력하게 유지되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상처 입은 나, 미약한 나, 병신 같은 나, 그런 나를 비웃으면서 진심으로 우스움을 느끼고 싶고 불안을 해소하고 싶다. 그러나 상처만 핥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두고 웃을 수가 없다. 자조는 하겠으나, 그것은 재미 없는 자기 혐오에서 나오는 차가운 웃음이다. 자기 자신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나와야 웃을 수 있다. 부조리한 구조에서 이기려고 아둥바둥하지 않고 그 구조를 두고 웃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멋있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물며, 그런 사람이 되기는 참 쉽지 않은데 막상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쉽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어느 정도 나한테서 벗어났으나 아직 완전히 나를 두고 웃지를 못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구고신이다. 구고신 짱.)
4. 3번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은 "배제란 무엇일까” 이다. 내 친구는 일전에 배제가 곧 폭력이라는 귀결에 대해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말했다. 무의식적 배제는 우리의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어떻게 책임을 묻겠는가. 다만 배제가 의식적으로 일어날 때 그것을 경계해야 할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배제에 대해 쓰는 것은 3번에서 말한 온몸이 민감한 버튼 투성이인 재미 없는 사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쉽게 '배제'라는 말을 쓴다. 자기는 배제 당했다, 자기의 개인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에 대한 폭력이다!
지금 나는 배제 당하는 사람 모두를 비웃으면서 그들을 상처 입히려는 의도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다만 옳은 이야기인데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멍청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저들은 나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어! 나는 배제 당했어!”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참으로 딱한 심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쓰고 있다. 아무 것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 온 몸이 버튼 투성이어서 자신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폭력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불쌍하군요. 그런데 재미 없어요. 빨리 자기 자신을 비웃으면서 노잼 탈출합시다.
5. 4번을 쓰면서 나는 불안했다. 나는 뭐 상처 극복한 쿨한 인간마냥 굴었지만 나는 전혀 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벗어난 상처에 다시 사로잡혀서 죽어라 노잼이 된다. 다만 나는 내가 충분히 카니발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런데 자기가 노잼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들 중 심각한 일부는 또 자신의 특수한 맥락을 지나치게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며 멍청한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각설하고, 트위터 하다가 그런 사람들이 간간히 눈에 띄어서 이런 병신 같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재미 없고 오만하고 멍청한 인간이다. 그래서 노잼인 나를 열심히 비웃는 중이다.
6. 하지만 친구의 말마따나 나는 공부를 하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무의미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은 적당히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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