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1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감상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표정. 금세 사랑에 빠진다. 촌스러울만치 화려하고 과장된 화면 속에서 그녀는 노래하고 춤을 춘다. 결 좋은 머리카락은 부시시해진다. 깨끗한 옷은 결국 더럽고 보풀이 인 스웨터가 된다.
마츠코는 혐오스럽다. 그녀의 순수한 모습은 점점 멍청해 보인다. 우리는 그녀가 절망하기 전 흘러나오는 음악과 율동에 깔깔 웃는다. 그러나 그렇게 웃기만 할 것인가. 혐오스러운 그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릴 것인가.
과외하는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면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대한 리뷰를 찾았다.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그녀에 대한 연민이 깃든 평이 많았다. 그녀의 개인적인 삶에 파고들면, 그녀의 삶은 눈물겹다. 그저 마츠코는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았는데 번번이 좌절되고, 그녀는 점점 잊혀져 간다. 아무리 지옥 같아도 혼자인 것보다 낫다는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생생했다.
하지만 석연찮았다. 그저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는 정도로 끝내야 할까.
매 맞는 여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여자에 대해 말하는 페미니즘을 조롱하듯, 수동적이고 어쩔 때에는 참으로 멍청한 여자가 나오는 작품. 이것을 어찌해야 할까. 교수님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이거 어떡할까요.
그러게요, 어떡할까요. 그렇다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는 틀려먹었어, 이런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를 뜯어 고쳐야 해, 라고 시원하게 말할 수도 없는데 말이죠.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다시끔 물컹거리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더 있다. 그녀를 그녀 자체의 개인적인 삶에 한정하여 말하기엔 부족하다. 오히려 개인적인 삶에만 집중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다. 참으로 힘 빠지는, 어이 없게 죽은 그녀에 대한 애도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게 많지 않으므로 그녀의 개인적인 삶을 초월한 맥락에서 그녀를 이야기할 수 없다, 아직은. 그래서 오늘 마구잡이로 쓰는 감상은 그녀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로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삶에 귀를 기울이고 슬퍼하는 일이다.
나를 사랑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끔찍한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사랑 받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든 일일까요, 라고 말하면서. 왜 당신은 비틀린 상대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비틀린 사랑을 찾는 걸까요, 라고 생각하면서.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샤오미 게임패드 리뷰 및 샤오미 pc에 연동하는 방법

2022년 2월 10일

2021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