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부 하기 싫어서 일기를 쓴다. 지금 있는 이 곳의 카페는 1주일 전에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혼자서 뭘 하기가 참 좋다. 인테리어도 내 취향이고 화장실은 카페 내부에 있는데 무척이나 깔끔하고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한적하고. 자리도 편하고 콘센트도 있다.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현대인에게 아주 적합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단점이라면 아주 불편한 접근성인데, 이곳으로 오는 버스가 없어서 한참 걸어가야 올 수 있는 곳이다. 그래도 그 힘듦을 감수할 만한 곳이다.
2. 엄마와 아빠는 요새 말을 안 하고 산다. 이혼하기에는 그들의 감정의 골이 그리 깊지 않고 그 법적 절차가 무척 번거로우며 아빠는 이혼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해서 그냥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은 공간을 같이 점유하며 살기로’만’ 한 것 같다.
그와 별개로 나는 매주 금요일 밤에 부모님 집으로 온다. 홀로 있을 방이 부모님 집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모종의 책임감이 있다. 엄마와 외식을 하면서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시간을 꾸준히 가져야 한다는 그런 책임감이다. 나는 이제 엄마와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에(오히려 좋은 편이다) 그런 책임감이 나한테 그리 부담이 되는 건 아니다. 엄마가 나와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고 행복해한다는 것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게 좋으니까.
3. 이번 학기부터 코어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서약서에 동의하는 대가로 월마다 내 수중에는 75만원의 돈이 들어온다. 다음 학기부터는 월 60만원을 받게 되고. 그러나 내 지출은 월 75만원을 초과한다. 그것은 내가 먹고 싶은 게 생길 때 먹으며 (그것이 만원이 넘는 초밥이라던가 3만원 가까이 되는 아웃백 스테이크라 하더라도)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매일 커피를 사 마시고 담배를 꾸준히 태워서 그렇다. 저번 달에는 노트북이 필요해서 인민에어를 사느라 60만원을 쓰기도 했다. 나의 지출 내역을 보면 내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드는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코어 장학금을 받아도 불안하다. 그래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찾는다.
4. 오늘 아침에 신경정신과에 갔다. 3주치의 항우울제를 받기 위해서이다. 사실 학교 근처의 병원으로 옮기는 게 합리적이나 병원을 옮기는 게 귀찮고 나는 지금 다니는 곳의 선생님이 마음에 든다. 1시간 정도 기다린 끝에 진료실에 들어갔다. 요새는 공부가 하기 싫으면 그냥 안하고 수업 가기 싫으면 수업에 안 가고 내가 그러는 것에 대해 그리 불안감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자 선생님이 혹시 무기력한 건 아니죠, 하고 걱정했다.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냥 내가 무척 놀기 좋아하고 몸이 힘든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고 항우울제가 그런 나의 성향을 마음껏 드러내게 해주는 듯 하다.
위기감이 들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위기감이 든다. 그런데 전과 달리 그 위기감이 생각으로만 들고 그것이 나한테 불안을 주진 않는다. 지금 분명히 공부를 하고 자료를 찾고 레포트를 써야하는데, 퀴플 초고를 완성해야 하는데 일기나 쓰고 있는 나 자신이 걱정스럽다면 걱정스럽다. 그런데 일단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어차피 일기를 안 쓰면 하는 것이 뭐냐,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가 트위터를 하고 있겠지.
5. 이번 학기에 내가 가장 공을 들이는 수업은 두 개다. 하나는 소그룹고전원전읽기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프랑스철학이다. 전자는 1학점짜리이고 졸업에 필수적인 수업이나 S/U라서 그리 공을 안 들여도 되는데 (즉 출석만 해도 된다) 현상학 공부하기가 좋아서 열심히 준비해서 간다. 덤으로 독일어 독해 실력도 기르고. (물론 실제로 길러진 건 독일어 단어 찾기 능력이다) 실제로 출석하는 수강생들은 총 4명으로 (나 포함) 내 독일어 실력은 썩 좋진 않은데 그 4명 중에서 내가 제일 열심히 준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제일 질문을 많이 한다. 그 사실이 우스울 때가 있다. 그 선생님은 내가 엄청 성실한 학생이라고 생각할 텐데 다른 수업에서는 개판이니까.
현대프랑스철학은 데리다를 배워서 좋다. 들뢰즈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교수님이 좋으니까 들뢰즈를 적어도 싫어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동 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간다면 현대프랑스철학을 공부할 가능성이 높아서 선생님의 눈에 들려고 나 나름대로 애를 쓴다.
6. 생각을 많이 한다. 예전에는 그럼 생각을 안 했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요새 하는 생각은 예전보다 더 문제의식이 날카로워지고 좀더 구체적이고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더 괴로운 게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내가 예전보다는 아는 게 많아져서 더 민감해졌고, 느긋하게 있기에는 나를 자극하는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삶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새삼 뭘 그러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느끼고 그것이 나한테 제일 두려운 일이다. 요새는 피해/가해 구도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많고 인간으로서 내가 모르는 인간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나는 음험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차 있고 상처 받기 쉬운 예민하고 나약한 인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쉽게 평가하고 그를 매몰차게 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고 나는 그 가능성으로 인해 내가 가해자가 되는 가상의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다. 옛날의 내가 외면했었던 타인과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나 혼자 생각하는 일에서만 끝내고 싶지 않고 이에 대해 공부하고 이에 대해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이 문제의식을 까먹지 않기 위해 혹은 까먹지 않았으나 그냥 외면해버려서 영원히 이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음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기에다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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