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1일


1.

부모님 집에 머무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은 다음과 같다.

a) 혼자만의 방이 있다. 밤 늦게까지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기타 등등을 할 수 있다.

b) 커피를 내려 마시기 아주 수월하다.

c) 식비가 많이 절감된다.

d) 엄마와 아빠라는 타인이 있기 때문에 어떤 공간에 홀로 살고 있다는 외로움이 가신다.

e) 엄마나 아빠가 가끔씩 아침 또는 저녁을 차려준다.

단점은 다음과 같다.

a) 가족들 간의 문제에 어쩔 수 없이 연루된다.

b) 담배를 피우기가 힘들다. 눈치껏 밖에 나가서 피우거나 과외 하기 전에 피우거나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 피우거나 밤에 방문을 꼭 잠그고 환기에 신경 쓰며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운다.


2.

오늘은 단점-a항 때문에 피곤했다. 울적하기도 했다.

부모님과 늦은 아침을 먹고 잠이 다 깨버려서 커피를 내려서 엄마와 아빠한테도 주고 내 몫까지 내려서 방으로 들어와 칸트 순수이성비판을 읽을 때였다. (앞으로 철학을 공부할 예정이므로 더 이상 칸트 읽기를 미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의무적으로 매일 1페이지라도 읽으리라 마음 먹었다)

엄마는 김치를 담그느라 순무와 무를 손질했고 아빠는 텔레비전을 봤다. 즉, 그들은 오랜만에 거실이라는 한 공간에 같이 머물렀다. 엄마는 아빠한테 친오빠 이야기를 했다.

친오빠 이야기를 하자면, 친오빠는 졸업을 미뤘고 1년 동안 취업준비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친오빠는 수원에서 학교를 다니며 자취하고 있었고, 2016년 2학기 내내 부모님 집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며 (추석 때 한 번 비추고 끝이었다) 겨울방학에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의 이야기 끝에 겨울방학부터 부모님 집에 머물면서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취업준비를 시작하기로 그들은 합의했다. (그 과정에서 좁아 터지게 된 부모님 집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하자)

그래서 필연적으로 언젠가 오빠와 부모님 사이에 트러블이 있을 것이었고, 그 일이 생각보다 너무 일찍 터져 버려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오빠가 게임을 하느라 아빠가 차려 놓은 저녁상 앞에 10분 이내로 앉지 않은 바람에 술에 취한 아빠는 친오빠에게 취업 준비도 못하고 나 같으면 나가 죽는다 네가 고등학생이냐 네 마음대로 할 거면 따로 살아라 엄마랑 이혼할 테니까 엄마랑 같이 살아라 등의 폭언을 내뱉었다) 친오빠는 수원의 자취방으로 다시 돌아갔기에 엄마는 친오빠의 반항적이고 제 멋대로인 사고방식을 고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는 아빠한테 친오빠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을 요구하며 아빠에게 품은 불만을 털어 놓았다.

늘 있던, 익숙한 토요일 풍경이다. 나는 이러한 광경을 수없이 보았고 이러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와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가 싫어서 나는 유튜브로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대충 클래식 음악 마니아인 친구들이 좋아하는 작곡가를 검색해서 아무 거나 틀었다. 그걸 들으면서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다.

그리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거실에서 들려 오는 소리들을 숱하게 들어 왔기 때문에 내가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고 책을 읽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시간 반 정도를 책 읽는 데 투자했고 그 후엔 책에 질리고 나른해서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도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바그너의 음악 선집을 들었고 누워서는 쇼팽의 음악 선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아빠는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밖에 나갔고 나와 엄마는 외식을 하려고 했지만 밖에 눈이 내렸기 때문에 엄마는 차를 운전하길 꺼려했다. 그래서 집에서 치킨을 시켜 먹으려고 했는데 눈이 와서 배달할 수 없다는 대답밖에 듣지 못했다. 그래서 아빠한테 전화해서 술 다 마시고 집으로 오는 길에 치킨을 사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아빠는 늦게 왔다. 치킨을 사오라고 전화를 걸었던 게 저녁 일곱 시였고 아빠가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열 시 반이었다. 아홉 시에 엄마와 나는 배가 고파서 그냥 늘 먹는 밥과 반찬을 먹었다.

아빠는 KFC 치킨을 사 왔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부른 배가 더 불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안 먹는다고 했는데, 아빠가 추운 밤 고생해서 사온 성의를 봐서라도 먹으라는 강요 때문에 닭다리 하나만 겨우 먹었다.

술에 취한 아빠는 맨정신인 상태에서 보내지 않았던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을 그제서야 보내고 싶어하기 때문에 나한테 커피를 내려서 식탁에 앉아서 마시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오늘만은 가족과의 화목을 위해 억지로 커피를 내려 마시거나 혹은 아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부드럽게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 나는 말했다. 아빠는 술에 취하면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고 싶지? 맨 정신일 때에는 혼자 있고 싶고. 나는 아빠가 술에 취하면 방에 들어가 있고 싶어. 사실 아빠가 맨 정신일 때에도 그래. 그래서 아빠를 이해해.

아빠는 더 이상 나한테 강요할 수 없었고 나는 방에 들어왔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으니 엄마가 아빠와 시댁에게 품은 서러움과 원한을 쏟아내는 소리가 거실로부터 들려왔다. 아빠는 늘 그렇듯이 그냥 듣고만 있고 엄마가 원하는 반응은 절대로 해 주지 않는다. 아빠는 막걸리 한 병 정도를 더 마셨을 것이고, 술을 다 마시자 당신에게 비호감인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안방에 들어가 자겠다는 말을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자정까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봤다.

늘 그렇듯 익숙한 가족의 화목한 한때이다. 그러나 오늘은 기분이 울적해서 그런 한때를 벽 너머로 상상하고 있자니 가슴이 뻐근해지며 모든 게 지리멸렬하고 피곤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원망이라든가 그런 건 느끼지 않는다. 그것을 느끼기에 나는 이미 가족을 너무 먼 타인으로 느끼기 시작했고 그들에게서는 나보다 못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연민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게 어쩌면 더 나에게 울적할지도 모른다.

친오빠는 아빠랑 싸우고 나서 엄마한테 카톡으로 이딴 집구석에 나를 왜 싸질러 낳아놨으며 나 같이 못난 자식 낳아서 엄마아빠가 고생이 많다는 원망과 비아냥거림을 보냈다고 한다.

나는 그냥 아주 가끔씩 엄마가 좀더 단호하게 나를 낙태할 의지를 품고 나를 낙태했으면 하는 상상으로 그친다. (엄마는 한창 일에 치이고 시댁에 치일 시기에 나를 임신했으며 계획에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나를 낙태시키려고 했으나 결국엔 낙태하지 못했다-여기에 대해 엄마는 의사에게 성 감별을 요구하지 않은 상태로 그저 뱃속의 아이의 힘찬 발길질과 호랑이 꿈이라는 태몽으로 나의 성별을 남자로 짐작했으며 남자아이를 둘이나 낳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낙태를 할 이유에 하나가 추가되었다고 말했으나 낳고 보니 여자아이여서 엄마는 너무 기뻐서 친오빠를 낳았을 때 하지도 않았던 '주변 사람들에게 한 턱 쏘기'를 했다고 한다)


3.

오늘은 게임도 너무너무 재미가 없었다. 내가 1년 넘게 엄청나게 몰입하며 재미있게 했던 게임인 파판14도 이제는 재미가 없다.

위쳐3도 플레이시간이 90시간을 넘어가자 한두시간만 해도 이미 질려버린다.

내가 즐겨보던 유튜브 게임실황도 정말 재미가 없었다.

며칠 전에 연숙이로부터 파이트클럽을 보지 않은 자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 파이트클럽을 시작으로 영화 2편을 봤는데, 오늘은 영화를 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몸에도 활력이 없다. 늘 몸은 무거우나 침대에 누워 있으면 눕기가 싫어진다. 당연히 잠도 오지 않는다.

해가 뜨고 세상이 밝아지면 억지로라도 밖에 나가 책을 읽어야 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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