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0일: 우울함 캐기
우울함 캐기
0. 나는 음울한 것을 좋아한다. 우울과는 좀 다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음울한 것은 가끔씩 우울한 것과 맞닿아 있기도 한다. 음, 말하자면 음울과 우울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와 그 느낌의 차이인 거 같다.
우울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풀어놓으면서도 어쩐지 매력적이고 희망이 살짝 묻어있는 것. 희망이 묻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매력적인 우울함.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음울함이다.
1. 내가 좋아하는 음울함에 대한 것으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어떤 특성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 그 어떤 특성이라는 것은 사람들 속의 음울함을 들여다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사람의 음울함을 본다는 것은 어쩔 땐 피곤하고 곤란한 일일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들여다 봐선 안 될 것 같은 남의 일기장을 읽는 기분일 때가 있다.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듯한 죄책감과 거기에서 나오는 길티 플레져. 꼭 훔쳐보듯 남의 음울함을 보지 않아도, 누군가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듯 말하는 음울함을 듣는 것도 좋다.
왜 나는 사람의 우울함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가. 그 부정적인 것에 나까지도 휘말릴 수도 있고,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에 매혹되는가.
여럿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내 안에 있는 음울함 때문인 거 같다. 누구나 나같은 음울함을 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나만 특별나게 나약해서 음울한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 누구나 똑같이 음울한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확신이 필요한 거 같다. 좀 구리긴 하지만 평범함이란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고 싶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음울함이라는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이것은 특히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한테 느끼는 감정이다. 어쩐지 이 사회에서 부정적인 것은 공유되어서는 안되는 비밀 비슷한 것으로 취급될 때가 있기 때문에, 비밀을 공유한 친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든다. 가끔씩.
3. 타인의 음울함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나의 음울함을 말하고 싶어한다. 그건 내가 힘들다는 하소연이다. 나 이렇게 우울해요. 힘들어요.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누군가 날 위로해주세요. 그렇기에 가끔씩은 어리광이 되고 생떼가 되기도 한다. 나조차도 타인의 어리광을 잘 받아주는 성격이 아닌데, 다른 사람이 내 어리광을 들어줬으면 하는 심보. 그런데 어쩔 수 없다. 변명이어도 어쩔 수가 없다.
분명 어렸을 때에는 솔직하게 내 심정을 다 털어놨던 거 같다. 나의 깊은 음울함까지도 그냥 다 얘기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음울함을 속에만 가둬놨다. 음울함을 털어놓는 건 내가 지고 있는 짐을 남에게 떠밀어 주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부터 그랬던 거 같다. 나한테는 정말로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품은 음울함을 내가 감당할 수 없었을 때부터 난 그걸 깨달았다. 그 친구는 자기 블로그에 온갖 우울함을 다 털어놓았고, 내가 해결해줄 수 없는 그 음울함에 나는 결국 그 애한테서 도망쳤다.
모두들 나같은 생각 때문에 말을 아끼는 걸까. 멘붕 트윗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 트위터에 플텍으로 부계를 만들어 멘붕 트윗을 하는 이유. 모두들 음울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꺼린다. 남한테 음울함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아한다.
그것은 남에게 폐를 끼쳐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음울함이 자신의 치부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 얘는 멘붕이 잦구나, 얘는 예민하구나, 얘는 약하구나, 얘 또 감성 트윗하네, 얘 또 오그라드네, 얘 지금 흑역사 만드네ㅋㅋ 라고 남들이 생각할까봐?
방금의 문단은 ‘왜 남들은 우울한 이야기를 안할까'에 대한 이야기인 거 같지만 사실 '왜 나는 우울한 이야기를 안할까'에 대한 답인 거 같다. 음울함을 드러내는 것은 약점을 내놓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정답인 거 같다, 왜 나는 우울한 얘기를 하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그냥 좀 무서워진다. 나를 피할까봐. 옛날의 나처럼 친구의 우울함을 감당 못하고 나한테서 멀어질까봐. 그렇기에 누군가 자기의 우울함을 이야기하는 게 반갑다. 남들이 말하니까 나도 내 우울함을 말해도 될 거 같다. 나의 부정적인 것을 말해도 괜찮을 거 같다. 왜냐하면 너도 했으니까. 내 이야기를 한다고 날 부담스러워하진 않겠지. 이런 생각.
4. 이런 쓰잘데 없는 거 같은 이야기(하긴 쓰잘 데 있는 글과 쓰잘 데 없는 글을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하는 것은 불현듯 과거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실 팬픽 읽다가 이랬다고는 말 못하겠다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되어서 예전의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자해를 해봤다. 절망감에서 한 건 아니고 분노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는데 그 대상이 나 자신이 된 것이었다. 자해는 몇 번 시도했으나 거의 대부분 실패했는데(왜냐하면 진짜 아파서 제대로 못했다) 딱 한 번 제대로 된 자해를 했었다.
그 날은 아빠한테 진짜 일방적으로 맞은 날인데(나는 피곤해서 아빠한테 짜증을 냈었고 아빠 또한 피곤했기 때문에 내 짜증에 빡쳐서 신문지 말은 걸로 내 머리를 몇번이고 사정없이 내려쳤고 그 과정에서 내 안경도 내 자존심도 다 구부러지고 망가졌었다) 그 분을 참지 못해서 칼로 내 왼쪽 손등을 마구잡이로 그었다.
사실 긋고 나서도 내 자신이 놀랐는데, 왜냐하면 아픈 게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아파 죽을거 같아서 긋다가도 힘을 뺐는데. 이번엔 피가 나도록 그어도 별로 아픈 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아프긴 아팠다). 피를 보니까 분이 조금은 풀리는 거 같았다. 다만 그 후로 깊은 절망감이 들긴 했지만.
근데 웃긴 건 화나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내 몸을 걱정했는지 자해를 한 커터칼을 잘 소독해서 자해를 했다는 거다. 어쨌든, 내 손등을 마구잡이로 그은 후에도 분이 안풀려서 애꿎은 빈 공책도 막 칼로 찢었다. 손등에 난 상처에서 피와 진물이 섞인게 흐르자 나는 후시딘을 발랐다. 씻고 자려고 알몸으로 화장실 거울을 봤는데 그때 나는 정말 못볼 꼴이었다. 펑펑 울어서 눈은 팅팅 부어있었고 얼굴은 빨갛고 손등은 난도질당한 빨간 상처로 가득했다. 진짜 그 땐 내가 정말로 못생겨 보였다.
그 후로 뭐 여럿 후일담이 남아있다. 다음날 학교에 가야 하는데 손등에 있는 상처를 어떻게 가리나 고심했고. 이걸 본다면 누구라도 날 미친년 무서운 애로 볼테고 그래서 난 보건실로 가서 보건선생님께 손등을 보여줬다. 그때 보건선생님은 날 위로해줬는데 정말 별것 아닌 이야기인데 눈물이 뚝뚝 흘렀다. 엄마아빠한테서 듣고 싶은 이야기를 보건선생님한테 들어서 그런 거 같았다. 뭐 어쨌든 보건선생님은 내 왼쪽 손에 붕대를 감아줬고 의심 안 받게 파스를 뿌려줬다. 애들은 내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 어디서 싸움질하다 왔냐고 농담따먹기를 했고 난 그냥 웃어넘겼다. 그 후 난 엄마한테 사실 붕대감은 손은 삔 게 아니라 내가 자해한 거라고 말하니까 나도 알고 있었다고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엄마한테 졸라 놀랐고 실망했고. 사실 자해를 한 건 약간 부모님께 시위 비슷한 행위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 자해행위에 동요하지 않고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하는 엄마의 태도를 보고 좀 질렸던 거 같다. 그 이후로 철저히 부모님을 날 챙겨주는 스폰서같은 하우스메이트로 여겼던 거 같고.
자해를 해본 건 어떤 면에서 값진 경험이었는데, 그 이유는 많은 것을 알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 중 몇 개를 말하자면 일단 부모님은 경제력 이외에는 그다지 기댈 사람이 못 된다는 거였고, 그 다음으로는 왠만한 절망감 혹은 분노가 아니고서는 자해를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아님 아픔을 견뎌내는 능력이 킹왕짱 크거나. 칼로 긋는 건 진짜 아프다. 진짜 아무런 부정적 감정 없이 평온한 상태에서 자기 몸을 칼로 긋는 사람은 진짜 독한 사람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어느새 타자 속도가 빨라지고 속은 후련해졌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다 쓰고 난 다음 publish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가 아무리 남들한테 우울한 이야기를 잘 꺼낸다고는 하지만(많이 자제하지만 그래도 남들보다는 많이 하는 거 같다) 진짜 자해 이야기만큼은 털어놓기 어렵다.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애인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넷 블로그에 올려도 되나. 주변 사람들이 날 부담스러워 하면 어쩌나. 트위터에서 폭풍 언팔을 당하면 어쩌나.ㅋㅋ
5. 이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서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에 서론이 쓸데없이 길고 장황하고 구구절절했다. 그래서 안 읽는 사람이 많을 거 같기도 하다. 안전장치 비스무리하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 글을 길어서 안 읽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바라지 않는 일이다. 나는 무섭지만 내 얘기를 누군가가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공감이든 혐오든 연민이든 이 글에 대한 반응이 어떻든지 간에.
나부터 깨고 싶다. 우울한 이야기를 터부시하는 것. 그냥 모두들 편하게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 아닐까. 눈치 안 보고.
싫음 어쩔 수 없는 거구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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