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2일
나는 말을 지나치게 했으면 했지 결코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민이 있으면 친구한테 항상 털어놨고, 친구와 있을 때의 어색한 침묵은 너무도 싫어했다.
그러나 말을 아끼지 않고 지나치게 하는 특성은 여러 친구에게 막말이라는 형태로 던져졌고, 한 친구에게는 특히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막말은 아니었다. 내 기준에서 막말인 거 같아서 사과하면 친구는 기억을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는.)
어느 순간, 나는 말을 아꼈다.
그러나 여기서 ‘말'이라는 것을 구분해야겠다. '진솔한’ 말을 아끼게 되었다고 하자.
나의 진심이 들어간 말이면 일단 멈칫하게 된다.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결론은 “하지 말자.” 내가 참자. 하더라도 빙빙 돌려서 말하자.
그러한 순간이 내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순간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난 믿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답답하고 응어리졌는가. 변비도 이런 변비가 없다.
다행인건 용기를 내는 것은 순간이라는 것이었다.
일단 텍스트창을 키고 나니, 쓰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렇다, 진심을 털어놔서 그렇다.
진심을 털어놓는 것은 어떤 때는 너무도 어렵고 어떤 때는 너무도 쉽다.
지금은 쉬운 편에 속한다. 다행인 일이다.
사실 노트북으로 글을 쓴 것은 오랜만이다. 이제껏 노트북을 키면 서핑질, 유튜브, 정보를 흥청망청 소비하는 형태였다.
지금 계절학기로 듣고 있는 생명의료윤리 피드백을 작성하기 위해 겨우겨우 노트북을 켜서 썼다. 아까 전에 발송했다.
피드백을 쓴 것은 강제적인 비강제 점수 때문에. 1, 2점의 미소한 차이로 점수가 갈리는 수업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파악했는데 피드백 보내기라는 강제적 비강제 과제는 배점이 5점이나 된다. 미리 꾸준히 보냈어야 했다. 이번 겨울은 너무도 게을렀다.
중간 과제도 지각해서 내고, 중간에 엄청나게 간단한 퀴즈 정답도 보내지 않았다.
어쨌든 결국 피드백을 썼다. 저번 수업은 생물학적 측면에서 바라본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관 경향의 차이였다.
나는 그 수업을 들으면서 겨울방학 시작부터 읽고 있는 성 정치학 책의 구절들이 수업 내용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것을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피드백으로 보내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2학기 때 들은 성의 철학과 성윤리 수업의 내용 또한 그러한 피드백을 쓰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두려웠다는 것이었다. 전혀 그럴만한 일이 아닌데도, 피드백을 쓰는게 두려웠다. 쓰는 건 힘겹지 않았지만 두려웠다. 보내도 될까, 하다가 결국 보냈다. 보내지 않으면 점수가 없다. 보내면 점수가 있다. 그저 심기가 불편할 뿐.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기분이 꽤 괜찮다. 음, 어디가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비웃음 당할지도 모르는 밑천을 사용했다는게. 괜찮다, 꽤 괜찮다.
지금은 기분이 더 괜찮다. 일기라도 휘갈겨 쓸 수 있다는게. 잠시나마 말을 지나치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글을 못 쓴다는 것, 불편하다. 변비는 치료해야 할 병이다. 특히 글 변비증은.
p.s. 텀블러 블로그는 항상 글 변비증을 하소연하는 곳이다. 그렇게 된 것 같다.
시작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 회상에서 결국 주로 다룬 것은 글 안써진다고 징징징징.
소설을 쓰고 싶다. 소설이 아니라도 에세이를 쓰고 싶다. 아무튼 뭐든 쓰고 싶다.
개강하고 나서는 레포트를 '잘’ 쓰고 싶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며칠 뒤에 생명의료윤리 기말시험같은 기말과제를 써야겠지만 걱정이 하나도 안 든다.
다행일까?
p.s.2.
블로그에 포스팅을 꾸준히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어떻게 글을 그렇게 자주 쓸 수 있는지 신기하다. 그렇게 되고 싶다. 진심을 털어놓고 싶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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