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30일
1.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잡생각을 다 한다. 대개 그런 생각들은 처량맞거나 폭력적인 것들인데, 예를 들자면 내 친구가 죽거나 아빠를 내 손으로 죽이는 거나 친척들을 몰살하는 것을 상상하는 거라든지 내 인생은 망한 것 같군 등등이다. 과외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오느라 노곤한 몸으로 지하철을 타는 것은 처량맞은 생각을 하기 딱 좋은 조건이다. 어쨌든 좋은 조건 하에서 나는 갑자기 라임오렌지나무를 떠올렸고 나는 울컥했다. “뽀르뚜가, 저는 너무 빨리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라는 문장이 떠오르면서 유년기를 타의에 의해 박탈 당한 주인공에 빙의하여 감성에 젖었었다. 그리고 그 감성을 가라앉히자 이번에는 재능이 없는 내가 애처로워서 울컥했다. 이렇게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처량 맞은 생각을 하느라 기분이 잠잠해졌고, 어쨌든 나는 기숙사에 도착했다.
2. 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대로 되지 않는 걸까? 대부분의 사람은 재능이 없으며, 일부의 사람은 재능을 갖고 있어도 그 재능이 어떤 것에 대한 재능인지 알지 못한다. 아주 적은 사람만이 재능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고 그 재능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철학 공부하는 데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아주 울적해져 버렸는데, 이런 나를 달래느라 ‘그래도 나한테는 어떤 재능이 있을 거야.’ 라는 자위를 했다. 그런데 어떤 재능이 어떤 재능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자기의 적성을 알았더라면 불행이 덜했을까?’ 그리고 곧바로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더 절망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적성을 택하여 자기한테 주어진 조건 안에서 그나마 성공적일 수 있는 삶을 택할 수 있으나, 일부의 청개구리 같은 인간은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택해서 망할 것이라는 의심. 자기 적성이 뭔지 모를 때에는 언젠가 더 노력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잘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근거 없는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으나, 자기 적성이 뭔지 확실하게 알고 태어난다면 자기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어서 그 일부의 사람은 엄청나게 불행에 빠질 거라는 뭐 그런 생각. 그리고 내가 바로 그 가능세계 안에서 불행할 인간들 중 하나에 속할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3.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성실한 사람도 엄청 많다. 나는 성실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으며, 다만 처량 맞은 생각을 엄청나게 열심히 할 뿐이다. 내 친구들은 학점을 잘 받고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되게 잘 쓰고 통찰력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내가 젖은 장작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열심히 부채질을 해 봤자 장작이 이미 젖어있어서 성실하게 타질 못한다. 무언가를 성실히 할 집중력이 무척이나 부족해서, 집중력을 키워보겠다고 열심히 용을 써도 잘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슬펐다. 장작이 언제 마를지 몰라서.
4. 나름대로 수업을 잘 따라가려고 노력했었지만 2014년 2학기 성적은 2.66으로, 쳐놀고 공부 하나도 안 했던 1학년 1학기보다 학점이 더욱 좋지 않았다. 이렇게 학점이 바닥을 치게 된 건 내가 전공만 많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학을 하는 애들은 똑똑이들이며 글도 어느 정도 쓸 줄 안다. 그리고 책을 읽을 줄 알고 생각을 할 줄 안다. 그런데 나는 글자만 읽을 줄 알아서 책을 읽어도 별 생각이 안 들고 글을 어떻게 써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시험도 못 보고 레포트도 이상하게 쓴 것 같다.
이래서 나는 내년에 휴학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너무 아는 것도 없고 쓰는 능력도 없으니 잠시 휴학하고 기량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휴학하면 무기력에 빠져들어 더욱더 처량 맞아질 가능성이 높다.
5. 어쨌든 이리하여 나의 미래는 더더욱 불확실해졌으며, 공부를 학부 이후에도 할 생각을 때려치고 내 입에 풀칠할 생각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강해졌다. 불확실함에 판돈을 걸기엔 내 삶이 너무 흔들릴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삶이 흔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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